제8화. 너무 많이 아는 남자
삼성동 한성 대저택에 들어온 것은 어젯밤이었다. 동관 302호. 원룸보다 넓고 서아의 집 전체보다 조용한 방. 침대가 킹사이즈였다. 서아는 침대 한쪽 끝에서만 잤다. 나머지 공간이 비어 있었다. 빈 공간의 넓이가 불편함의 크기와 같았다.
아침 아홉 시. 오민재가 문을 두드렸다. 노크 세 번. 간격이 정확했다.
"한 사장님이 집무실에서 뵙겠다고 합니다."
서아는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 가져온 짐은 가방 하나였다. 옷 세 벌, 세면도구, 수첩, 노트북. 옷장에 넣지 않았다. 가방 안에 그대로 두었다. 풀면 사는 것이고, 풀지 않으면 머무는 것이었다.
집무실은 본관 17층에 있었다. 12층이 아니었다. 대저택 안에 별도의 집무 공간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달랐다. 카드키가 필요했다. 오민재가 카드를 찍고 버튼을 눌렀다.
17층. 복도가 12층보다 짧았다. 문이 하나뿐이었다. 오민재가 문을 열었다. 서아가 들어갔다.
방이 12층과 달랐다. 더 넓었다. 가구도 더 많았다. 책상, 소파 세트, 책장, 통유리 창 두 면. 서울이 두 방향으로 보였다. 남쪽과 동쪽. 아침 햇빛이 동쪽 유리를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방 안이 따뜻했다.
한서진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책상이 아니라 소파. 낮은 테이블 위에 커피가 두 잔 놓여 있었다. 한 잔은 한서진 앞에, 한 잔은 맞은편 자리에. 서아를 위한 것이었다.
"앉아."
서아가 소파에 앉았다. 12층에서와 달리 소파의 높이가 같았다. 시선 차이가 없었다. 서아는 그 차이를 알아차렸다. 12층의 낮은 의자는 의도적이었다. 여기는 다른 의도였다.
커피잔을 봤다. 블랙이었다. 서아는 블랙을 마시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손이 가지 않았다. 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낯선 방의 크기가 몸을 깨우고 있었다. 피곤할 때 서아는 단 것을 찾았다. 설탕이 든 커피. 법무사 사무실에서 야근할 때 자판기 커피의 설탕 버튼을 두 번 누르던 습관.
서아의 손이 커피잔 위에서 멈췄다. 0.5초. 블랙을 집을지 말지. 그 찰나에 한서진의 손이 테이블 위를 가로질렀다. 설탕 스틱 두 개가 서아 쪽으로 밀려왔다.
"오늘은 단 걸 찾을 줄 알았어."
서아의 시선이 설탕에서 한서진으로 올라갔다. 한서진은 자기 잔을 들어 마시고 있었다. 서아를 보지 않았다. 당연한 동작처럼. 서아가 오늘 단 것을 찾을 거라는 걸 아는 것처럼.
서아는 설탕을 집지 않았다. 블랙을 그대로 마셨다. 쓴맛이 혀를 눌렀다. 괜찮았다. 단 것을 찾는다는 걸 들키는 것보다 쓴맛이 나았다.
"잘 잤어?"
한서진이 물었다. 서아를 보지 않고. 커피잔 너머로 창밖을 보면서.
"네."
거짓말이었다. 한서진이 그걸 아는지 서아는 판단할 수 없었다.
"302호 온도가 낮았을 거야. 난방 설정 올려놓으라고 했는데."
서아의 손가락이 잔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방 온도. 실제로 낮았다. 서아는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리고 잤다. 그걸 한서진이 어떻게 아는 건지. 방에 온도 센서가 있는 건지, 다른 방법인지.
"온도는 괜찮았습니다."
"이불 더 필요하면 말해."
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불. 서아가 추위를 탄다는 걸 아는 것인지, 일반적인 배려인지. 구분이 안 됐다. 명확한 감시보다, 자연스러운 앎이 서아의 경계를 건드렸다.
한서진이 커피잔을 내려놓고 테이블 위의 서류를 집었다. 서아가 어제 가져온 수정안 최종본이었다. 서아는 그 서류가 여기 있다는 걸 보고 눈이 한 번 좁아졌다. 어제 오민재에게 넘긴 서류가 이미 검토된 상태로 놓여 있었다.
"9조 수정. 승인."
서아의 등이 미세하게 곧아졌다. 승인. 특별한정승인 신청을 막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열람 범위 확대. 조건부 승인."
"조건이 뭡니까."
"열람은 이 건물 안에서만. 외부 반출 금지. 디지털 사본도 건물 내 네트워크에서만."
서아는 수첩을 꺼내 적었다. 건물 내 열람. 외부 반출 금지. 디지털 제한. 은솔에게 사진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뜻이었다. 서아는 펜을 멈추지 않고 적으면서 생각했다. 이미 보낸 사진은 클라우드에 있었다. 이 조건은 앞으로의 것을 막는 것이지, 이미 나간 것을 회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한서진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서아를 봤다. 아침 햇빛이 한서진의 얼굴 왼쪽을 비추고 있었다. 오른쪽은 그림자. 절반만 보이는 얼굴. 서아는 그 비대칭을 읽으려 했지만 한서진의 표정은 언제나 같았다. 빛이든 그림자든 변하지 않는 얼굴.
"어제 명동에서 뭘 찾았어?"
서아의 손가락이 수첩 위에서 멈췄다. 오민재에게는 '아버지 개인 서류'라고 했다. 그 답이 그대로 올라갔는지, 한서진이 직접 묻는 건 다른 답을 원한다는 뜻인지.
"아버지의 장부 철이 있었습니다."
한서진의 반응 시간. 0초. 멈추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KC 코드."
한서진이 말했다. 서아가 꺼내지 않은 단어를 한서진이 먼저 꺼냈다. 3화에서 서아가 어디를 겨냥하는지 읽었던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서아는 한서진이 늘 한 발 앞에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네."
"몇 건이었어?"
"200건 이상이요."
한서진의 손가락이 소파 팔걸이 위에서 한 번 두드려졌다. 계산 중.
"아버지가 기록한 거야?"
"글씨가 아버지 것이었습니다."
한서진이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였다. 확인. 한서진은 윤태국의 글씨를 안다는 뜻인지, 서아의 판단을 신뢰한다는 뜻인지. 서아는 전자일 가능성에 더 무게를 뒀다. 한서진은 서아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장부 마지막에 도장이 있었습니다."
서아가 말했다. 이건 오민재에게 말하지 않은 정보였다. 한서진에게 직접 꺼낸 이유가 있었다. 반응을 보기 위해.
"한성회 도장이 아니었습니다."
한서진의 손가락이 멈췄다. 0.5초. 12층에서 KC 코드를 들었을 때와 같은 반응 시간이었다. 예상 범위 안이라는 뜻. 하지만 이번에는 손가락이 멈춘 뒤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계산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네 글자였어?"
서아의 등이 소파에서 떨어졌다. 한서진이 글자 수를 물었다. '어떤 도장이었느냐'가 아니라 '네 글자였느냐'. 글자 수를 알고 있었다. 후보가 있다는 뜻이었다. 네 글자짜리 도장의 후보를. 한서진은 그 조직을 알고 있었다.
"네."
한서진이 일어서지 않았다. 소파에 앉은 채로 서아를 봤다. 시선의 무게가 달라져 있었다. 서류를 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무게가 있고 온도가 없는 시선. 12층에서도 느꼈던 것.
"도장 사진은 찍었겠지."
질문이 아니었다. 서아가 사진을 찍었을 거라는 걸 한서진은 알고 있었다. 서아가 원본을 두고 사본을 만드는 습관을. 계약서 사본을 가져왔던 3화부터.
"찍었습니다."
"보여줘."
서아는 전화기를 꺼내 도장 사진을 열었다. 한서진에게 화면을 보여줬다. 한서진이 화면을 봤다. 3초.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이 화면에서 떠나는 속도가 빨랐다. 오래 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아니,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한서진이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서아를 봤다.
"차윤호 씨랑 오래 알더군."
맥락이 바뀌었다. 도장에서 윤호로. 서아는 그 전환의 의도를 읽으려 했다. 도장 이야기를 끊은 것인지, 윤호 이야기가 더 중요한 것인지.
"소꿉친구입니다."
"어제 아침에 열쇠 받았지."
서아의 손이 무릎 위에서 접혔다. 어제 아침. 윤호가 골목에서 열쇠를 건넨 것. 한서진이 알고 있었다. 시간까지. 오민재의 보고인지, 다른 경로인지. 서아는 대저택에 들어온 지 하루밖에 안 됐다. 그 하루 동안 서아의 이동, 접촉, 행동이 전부 기록되고 있었다.
"열쇠는 아버지 보관함 열쇠였습니다."
"알아."
짧았다. 3화에서 윤호의 이름을 말했을 때와 같은 두 글자. '알아.' 그 안에 들어 있는 정보의 양을 서아는 이번에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네."
한서진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서아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같은 높이에서 정면으로 봤다.
"당신이 오늘 뭘 찾았는지도 내가 더 잘 아는 것 같아서."
서아의 심박이 한 번 빨라졌다. 배로 호흡을 눌렀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배운 방법. 바깥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지만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소매가 가려주었다.
'당신이 오늘 뭘 찾았는지도 내가 더 잘 아는 것 같아서.' 서아는 이 문장을 분해했다. '오늘 뭘 찾았는지' — 장부 철과 도장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더 잘 아는 것 같아서' — 서아보다 그 도장의 의미를 더 알고 있다는 뜻. 그렇다면 한서진은 제3세력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
"도장이 어디 것인지 아십니까."
한서진이 대답하지 않았다. 1초. 2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조용했다.
"네 아버지가 왜 그걸 보관했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야."
답을 피한 것이었다. 서아는 그 회피를 기록했다. 머릿속에. 한서진이 도장의 출처를 알면서 말하지 않는 것. 이유가 있었다.
서아는 수첩을 닫았다.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한서진을 봤다. 소파에 기댄 자세. 아침 햇빛이 오른쪽에서 비추고 있었다. 아까와 반대쪽. 시간이 지나 빛의 각도가 바뀐 것이었다. 서아가 이 방에 들어온 지 30분이 넘었다.
한서진은 서아의 커피 취향을 알고 있었다. 잠을 못 잔 걸 알고 있었다. 방 온도가 낮은 걸 알고 있었다. 윤호와 만난 시간을 알고 있었다. 장부 철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도장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한서진이 서아에 대해 아는 양은 비정상적이었다. 며칠 사이에 조사해서 알 수 있는 범위를 넘어 있었다. 습관, 취향, 체온 감각. 이런 것은 관찰하지 않으면 모른다. 오래, 가까이에서.
서아의 입이 열렸다. 삼켜야 할 질문이었다. 하지만 서아는 삼키지 못했다. 새벽에 낯선 침대에서 천장을 보며 떠올린 질문. 설탕을 밀어주는 손을 보며 확신이 된 질문.
"저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죠."
방 안이 조용해졌다. 한서진의 커피잔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서울이 움직이고 있었다. 차들이 흐르고, 건물 사이로 빛이 반사됐다. 방 안만 멈춰 있었다.
한서진의 시선이 서아에게서 벗어났다.
처음이었다. 이 방에서, 12층에서, 병원에서. 한서진은 단 한 번도 시선을 먼저 피한 적이 없었다. 명령할 때도, 침묵할 때도, 서아의 말을 들을 때도 시선은 항상 서아 위에 있었다. 지금, 한서진의 눈이 창밖으로 갔다. 서울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서아를 보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1초. 2초. 3초.
한서진이 입을 열지 않았다. 서아는 세고 있었다. 병원에서 1초, 12층에서 3초. 지금은 3초가 넘었다. 4초. 5초. 대답이 오지 않았다.
서아는 일어섰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기다리면 한서진이 만든 답을 듣게 될 것이다. 서아는 준비된 답이 아니라, 이 침묵의 길이를 기억하기로 했다. 5초. 한서진이 대답하지 못한 시간. 그 시간 안에 진짜 답이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서아가 문 쪽으로 걸었다. 오민재가 문을 열었다. 서아가 나갔다. 복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손바닥을 봤다. 땀이 없었다. 하지만 손가락 끝이 차가웠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서아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숫자를 세며 호흡을 고르려 했다. 잡히지 않았다.
이 남자가 서아를 안 것은 병원이 처음이 아니었다. 서아는 그걸 확신했다. 설탕을 미는 손. 방 온도를 아는 것. 윤호와의 관계를 아는 것. 이 모든 것이 며칠의 조사로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다.
한서진은 서아를 오래전부터 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서아가 모르는 동안.
302호로 돌아왔다. 문을 닫고 가방 옆에 앉았다. 풀지 않은 가방. 서아는 가방 지퍼를 열어 수첩을 꺼냈다. 오늘 날짜를 쓰고 그 밑에 한 줄을 적었다. '한서진: 질문에 5초간 무응답. 시선 회피. 최초.'
수첩을 닫았다. 창밖을 봤다. 17층에서 내려다보던 서울이 여기서는 보이지 않았다. 302호는 3층이었다. 창 너머로 대저택의 정원이 보였다. 나무가 정돈돼 있었다. 잔디가 짧았다. 사람의 손이 닿은 자연. 서아는 그 정돈된 풍경이 불편했다.
서아가 나간 뒤, 한서진은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설탕 스틱 두 개가 테이블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서아가 집지 않은 것. 한서진은 그 설탕을 봤다. 서아가 피곤할 때 단 것을 찾는다는 걸 아는 것은, 오민재의 보고서에 쓰여 있지 않은 종류의 정보였다.
"민재."
오민재가 문 옆에 서 있었다.
"도장 건은 법무팀 빼고 처리해."
오민재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한서진은 테이블 위의 설탕 스틱을 집어 서랍에 넣었다. 서아가 다음에 필요할 때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