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우산은 닿지 않는다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이틀 만이었다. 서아는 현관문 앞에서 열쇠를 꺼내다 골목 끝을 봤다. 가로등 아래,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우산을 들고 있었다. 투명한 비닐우산. 이틀 전 편의점에서 산 것과 같은 종류였다.
차윤호였다.
서아는 열쇠를 문에 꽂지 않았다. 골목을 걸어갔다. 운동화가 물웅덩이를 밟았다. 윤호는 서아가 오는 걸 보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서아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는 자세. 우산이 서아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윤호의 왼쪽 어깨가 이미 젖어 있었다.
"뭐야. 왜 여기 서 있어."
서아가 먼저 말했다. 경어가 아니었다. 윤호 앞에서는 반말이 먼저 나왔다. 열두 살부터 같은 골목을 걸은 사이에 경어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연락이 없어서."
"어제 메시지 보냈잖아."
"그건 '살아 있다'는 거지, '괜찮다'는 게 아니야."
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윤호가 맞았다. 어제 보낸 메시지는 '내일 바빠. 나중에 연락할게'였다. 괜찮다는 말은 한 적 없었다. 괜찮지 않았으니까.
"들어와. 비 맞지 말고."
"안 들어가."
서아가 멈췄다. 윤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평소의 투박함이 아니라, 선을 긋는 톤이었다.
"왜?"
"네가 말해줄 때까지 여기 서 있을 거야."
서아의 손이 주머니 안에서 쥐어졌다. 윤호는 붙잡지 않는 사람이었다. 한 번 뻗고 거절당하면 내리는 사람. 그 사람이 서 있겠다고 했다. 서아는 그 차이의 무게를 알았다.
"아버지 빚 때문에 사람들이 붙어 있어. 그것만 알면 돼."
"누구."
"몰라도 돼."
"서아야."
윤호가 한 걸음 다가왔다. 우산이 서아 위로 왔다. 빗방울이 서아의 어깨에서 멈췄다. 윤호의 얼굴이 가까웠다. 가로등 불빛이 윤호의 눈 아래 그림자를 만들었다. 잠을 못 잔 얼굴이었다.
"네 집 앞에 차 또 있었어. 오늘은 SUV였어. 번호도 바뀌었고."
서아의 등이 굳었다. 차 종류가 바뀌었다. 번호가 바뀌었다. 교대한 것이다. 감시가 일회성이 아니라 체계적이라는 뜻이었다.
"어제 저녁에도 봤어. 네 골목 입구에 오토바이 한 대 서 있었거든. 배달 가방 없는 오토바이. 오늘은 없고 대신 SUV야."
서아는 어제 밤 집에 돌아올 때 본 오토바이를 떠올렸다. 번호판이 진흙에 반쯤 가려져 있던 것. 윤호도 그걸 봤다. 서아보다 먼저.
"윤호야, 제발 신경 끄---"
"못 꺼."
짧았다. 두 글자. 윤호의 입이 닫혔다. 더 말하지 않았다. 서아는 그 두 글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알았다. 감정이었다. 윤호가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는 걸 서아는 알고 있었다.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 비 오는 밤에 골목에 서 있는 것이 윤호의 언어였다.
서아의 목이 뜨거워졌다. 울 수 있는 종류의 뜨거움이었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남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것. 법무사 사무실에서, 채권자 앞에서, 한서진 앞에서 지켜온 것. 윤호 앞에서도 같았다.
"미안해. 근데 지금은 진짜 말 못 해."
윤호가 서아를 봤다. 3초. 입이 열리려다 닫혔다. 삼킨 것이다.
골목 끝에서 엔진 소리가 들렸다. 낮은 회전음이었다. 서아와 윤호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검은 세단이 골목 입구에 멈추고 있었다. 제네시스. 헤드라이트가 꺼져 있었다. 차문이 열리지 않았다. 멈춰 선 채 기다리고 있었다.
서아는 번호판을 봤다. 끝 네 자리. 이전에 본 7782도, 3314도 아니었다. 새로운 번호. 하지만 차종은 같았다. 한성회 쪽이었다.
"저거 또 다른 차야."
윤호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5초 뒤, 차 반대편 방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골목 뒤쪽. 서아가 돌아봤다. 남자가 한 명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 패딩, 마스크, 모자. 손에 A4 크기의 종이를 들고 있었다. 비닐에 싸여 있었다.
남자가 서아 앞 두 걸음 거리에서 멈췄다. 윤호가 서아 앞으로 반 걸음 나섰다. 우산을 쥔 손이 내려갔다.
"윤서아 씨 맞으시죠."
정중한 경어였다. 하지만 정중함이 위협의 포장인 종류가 있었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서아는 그런 목소리를 들어봤다. 추심업자의 말투. 공손하지만 물러서지 않는.
"누구세요."
"잠깐만 시간 좀 내주시면 됩니다."
남자가 비닐에 싸인 종이를 꺼냈다. 사진이었다. 서아의 어머니와 동생이 찍혀 있었다. 마트 앞. 최근 사진이었다. 동생이 입고 있는 패딩이 올해 산 것이었다.
서아의 시야가 좁아졌다. 사진 속 어머니의 얼굴이 또렷했다. 빗속에서도 인화 상태가 선명했다. 비닐로 감싼 건 비에 젖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보여주기 위해 준비한 것이다.
"가족분들 건강하시더라고요. 계속 그러시면 좋겠는데."
서아의 입이 열리기 전에 윤호가 움직였다. 우산을 접어 왼손에 쥐고, 오른손으로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빠르지 않았다. 정확했다. 사진을 든 손목. 남자가 한 발 물러섰지만 윤호가 놓지 않았다.
"사진 내려놔."
윤호의 목소리에 감정이 없었다. 평소의 직설이 아니었다. 차가운 직선. 서아는 그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중학교 때 취객을 막아섰을 때도 이 톤은 아니었다.
남자가 윤호를 봤다. 마스크 위로 눈이 좁아졌다. 체격을 재는 시선이었다.
"관계자분이신가요?"
"사진 내려놓으라고."
남자의 시선이 윤호에서 서아로 옮겨갔다. 다시 윤호로. 2초. 남자가 손목을 빼려 했다. 윤호가 힘을 주었다. 관절이 꺾이는 각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빠지지 않는 힘이었다.
골목 입구의 세단에서 문이 열렸다. 오민재가 내렸다. 검은 코트.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걸어왔다. 발걸음이 빠르지 않았다. 급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속도.
"놓으셔도 됩니다."
오민재가 윤호에게 말했다. 완전한 경어. 윤호는 오민재를 봤다. 오민재의 뒤에서 검은 양복 두 명이 더 내렸다. 윤호의 손이 천천히 풀렸다. 남자의 손목이 빠져나갔다.
오민재가 남자 앞에 섰다. 키 차이가 있었다. 오민재가 더 작았다. 하지만 한 발 물러선 건 남자 쪽이었다.
"이쪽은 저희가 관리하는 건입니다."
오민재의 목소리는 낮았다.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관리'라는 단어의 무게가 달랐다. 사무실에서 쓰는 관리와, 이 골목에서 쓰는 관리는 같은 단어가 아니었다.
남자가 사진을 비닐 안에 다시 넣었다. 주머니에 넣지 않고 오민재에게 내밀었다. 오민재가 받지 않았다. 3초간 사진이 빗속에 떠 있었다. 남자가 사진을 거두고 돌아섰다. 발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사라졌다.
오민재가 서아를 봤다.
"차를 준비했습니다. 타시겠습니까."
서아는 대답하기 전에 윤호를 봤다. 윤호가 서아를 보고 있었다. 우산을 다시 펼쳤지만 서아 쪽으로 기울이지 않았다. 자기 위에 들고 있었다. 눈이 달라져 있었다. 사진을 본 뒤부터. 분노가 아니었다. 이해였다. 서아가 왜 말을 못 하는지, 왜 혼자 버티는지, 이 골목에 무엇이 엮여 있는지를 처음 본 사람의 눈.
"서아야."
윤호가 불렀다. 서아가 윤호를 봤다. 빗물이 윤호의 이마를 타고 흘렀다.
"도와주는 건지 끌고 가는 건지, 보는 사람은 구분돼."
오민재를 보지 않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오민재를 향한 말이기도 했다. 서아는 그 문장이 골목 안에서 부딪혀 돌아오는 걸 느꼈다. 도와주는 것과 끌고 가는 것. 서아 자신도 그 경계를 몰랐다.
"괜찮아. 나 갈 데가 있어."
서아가 말했다. 윤호의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 믿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붙잡지 않았다. 서아가 가겠다고 하면 보내는 사람. 막지 않되, 서 있는 사람.
서아가 오민재 쪽으로 걸었다. 세 걸음. 오민재가 우산을 펼쳐 서아 위에 씌웠다. 검은 장우산이었다. 편의점 비닐우산과 무게가 달랐다. 서아는 그 무게의 차이를 어깨로 느꼈다.
세단의 뒷문이 열려 있었다. 서아가 타기 전 뒤를 돌아봤다. 윤호가 서 있었다. 같은 자리. 비닐우산을 들고. 서아를 보고 있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거리가 벌어져 있었고, 가로등 불빛이 역광이었다.
서아가 차에 탔다. 문이 닫혔다. 빗소리가 절반으로 줄었다. 차 안이 조용했다. 가죽 시트 냄새가 났다. 오민재가 운전석에 앉았다. 검은 양복 두 명은 다른 차에 탄 것 같았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한 사장님 계신 곳이요."
오민재의 시선이 백미러에 비쳤다. 0.5초. 서아를 봤다가 앞으로 돌렸다. 차가 출발했다.
서아는 창밖을 봤다. 골목이 멀어졌다. 윤호의 실루엣이 작아졌다. 비닐우산의 투명한 곡선이 가로등 빛에 한 번 반짝이고 사라졌다. 서아는 그 빛이 사라질 때까지 봤다.
손이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 끝이 차가웠다. 차 안의 온도는 따뜻했다. 히터가 켜져 있었다. 차가운 건 온도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12층. 같은 복도. 같은 카펫. 같은 무음. 서아는 세 번째 이 복도를 걸었다. 처음은 계약서를 들고, 두 번째는 수정안을 들고. 세 번째는 빈손이었다.
문이 열려 있었다. 한서진이 서 있었다. 책상 뒤가 아니라 창 앞이었다. 서울의 야경이 비에 씻겨 흐려져 있었다. 한서진이 돌아봤다. 서아를 봤다.
"무슨 일이야."
서아가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AP구파 쪽에서 접근했습니다. 가족 사진을 가져왔어요."
한서진의 턱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를 악문 것이 아니었다. 3화에서 봤던 것과 같은 동작. 삼킨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삼키는 시간이 더 짧았다. 0.3초.
"오민재."
"네."
"AP구파 연락책 신원 확인. 가족 접근 경로 전부 차단."
오민재가 고개를 숙이고 전화기를 꺼내 복도로 나갔다. 문이 반쯤 열린 채로 남았다.
한서진이 창에서 돌아 책상으로 걸어왔다. 서아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세 걸음. 멈췄다. 서아를 내려다봤다. 서아는 앉지 않았다. 서 있었다. 시선의 높이 차이가 있었지만 서아는 올려다보지 않았다. 정면을 봤다. 한서진의 넥타이 매듭 높이.
"다친 데 있어?"
서아는 그 질문을 예상하지 못했다. 0.5초 늦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한서진이 서아의 어깨를 봤다. 왼쪽 어깨. 비에 젖어 있었다. 오민재의 우산 아래서도 한쪽이 젖은 것이다. 한서진의 시선이 어깨에서 서아의 얼굴로 올라왔다. 어깨, 목, 턱, 눈. 확인하는 순서. 서류를 점검하는 것과 같은 체계적인 시선이었다. 하지만 서류를 볼 때는 이 정도로 느리지 않았다.
"가족은 내가 처리해. 내일부터 경호 배치할 테니까."
서아는 수첩을 꺼내지 않았다. 이 대화는 기록할 종류가 아니었다. 기록하면 채무의 일부가 되는 것 같았다. 보호를 받으면 빚이 되는 세계. 서아는 그 구조를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고마워할 일 아니야."
한서진이 책상 뒤로 돌아갔다. 앉았다. 서아는 여전히 서 있었다. 방 안이 조용했다. 비가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이 높이에서 듣는 빗소리는 골목에서 듣는 것과 달랐다. 더 멀고, 더 균일했다.
한서진이 서류를 한 장 꺼내 서아 쪽으로 밀었다.
"거주지 조건. 대답 가져왔어?"
서아는 서류를 보지 않았다. 한서진을 봤다.
"가족 안전이 보장되면 수락하겠습니다."
한서진의 손가락이 책상 위에서 한 번 두드려졌다. 계산 중.
"가족 안전은 이미 처리한다고 했어."
"서면으로 주십시오."
한서진의 눈의 각도가 바뀌었다. 위에서 아래로 보던 시선이 수평에 가까워졌다. 서아가 앉지 않았는데도.
"서면."
"네. 경호 배치 범위, 기간, 비용 부담 주체. 계약서 부속 합의서로."
서아의 목소리가 법무사 사무실 톤으로 돌아와 있었다. 감정이 빠진 실무 언어. 한서진은 2초간 서아를 봤다.
"민재가 내일 보내줄 거야."
서아는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돌아섰다. 문 쪽으로 걸었다.
"서아."
서아가 멈췄다. 한서진이 이름을 불렀다. 성이 아니라 이름. 서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등으로 듣고 있었다.
"다음부터 저 사람 근처에 있을 때 더 조심해."
저 사람. 윤호를 말하는 것이었다. 서아의 손이 주머니 안에서 쥐어졌다. 한서진이 윤호를 '저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름을 알면서. 3화에서 '차윤호'라고 불렀던 사람이, 오늘은 이름을 빼고 '저 사람'이라고 했다.
"윤호는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관계없는 사람이 새벽에 네 골목에 서 있지는 않아."
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를 걸었다. 카펫 위의 무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창밖을 봤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12층에서 보는 비는 줄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흐린 공기였다.
1층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오민재가 차 앞에 서 있었다. 서아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뜻이었다.
"걸어가겠습니다."
"비가 옵니다."
"알고 있습니다."
오민재가 0.5초 멈췄다가 고개를 숙였다. 서아는 윤호의 비닐우산을 가방에서 꺼냈다. 편의점 태그가 아직 달려 있었다. 2,500원. 서아는 우산을 폈다.
비를 맞으며 걸었다. 우산이 있었지만 어깨가 젖었다. 비닐우산은 그런 종류였다. 완벽하게 막아주지 못하는 대신, 가볍고 투명해서 앞이 보였다. 한서진 쪽의 검은 장우산은 비를 완벽하게 막았다. 대신 무겁고, 시야가 좁아졌다.
서아는 윤호의 우산을 들고 강남역 쪽으로 걸었다. 내일이면 3일 유예가 끝났다. 삼성동 대저택. 한서진의 집. 들어가면 이 골목에서 멀어졌다. 윤호의 우산이 닿지 않는 거리로.
전화기를 꺼냈다. 윤호에게 메시지를 쓰려다 멈췄다. 뭐라고 써야 할지 몰랐다. '미안해'는 부족했고, '고마워'는 잔인했다. 서아는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비가 세졌다. 서아는 걸음을 빨리하지 않았다.
서아가 나간 뒤, 한서진은 창 앞에 섰다. 12층에서 내려다보면 건물 앞 도로가 보였다. 서아가 투명한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오민재의 차를 거절한 것이다. 한서진은 그 우산을 봤다. 편의점 비닐우산. 차윤호가 서아에게 준 것이라는 걸 보고서로 알고 있었다.
한서진의 손이 유리에 닿았다. 차가웠다. 서아의 실루엣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한서진은 손을 내리지 않았다. 3초. 유리 위에 손가락 자국이 남았다.
"민재."
복도에서 오민재의 발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다.
"대저택 동관 302호. 내일까지 준비해."
오민재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한서진은 유리 위의 손가락 자국을 소매로 닦았다. 흔적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