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건드리지 마
3월 31일 화요일, 오후 2시 04분.
체육 시간이었다.
운동장에 나오니까 바람이 불었다. 3월 마지막 날이라 날씨가 아직 좀 쌌다. 반팔 체육복 위에 외투를 걸치고 나온 애들이 반쯤 됐다. 선생님이 준비운동부터 하라고 했다. 두 줄로 서서 팔을 돌리고 허리를 숙였다. 발목을 돌리는 애, 그냥 서서 하늘을 보는 애, 옆 사람이랑 떠드는 애. 체육 시간 운동장 특유의 풀어진 분위기였다.
오늘 수업은 피구였다.
반을 반으로 나눠서 코트 안에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코트는 운동장 한쪽에 라인으로 그어져 있었다. 선생님이 번호를 불렀다. 홀수 팀, 짝수 팀. 윤시하는 박지훈이랑 같은 팀이 됐다. 강수현은 반대편 팀이었다. 김하늘은 윤시하 팀이었다. 이수빈도 같은 팀이었다.
"피구 잘해?"
박지훈이 물었다.
"보통."
"강수현은 잘해. 팔이 세거든. 던질 때 좀 무서워."
"적이잖아."
"그러니까 미리 경고해두는 거야. 공 오면 무조건 피해. 각도 보고 피해야 해. 반응으로는 못 피워."
피구가 시작됐다.
처음 5분은 별 일 없었다. 공이 오가고, 사람들이 피하고, 간간이 탈락하는 사람이 나왔다. 운동장이 시끄러워졌다. 강수현이 던지면 대부분 맞았다. 팔이 빠른 것 같았다. 세게 던지는 것 같지 않은데 공이 날아오는 속도가 달랐다. 코트 반대편 끝에서 던지는데도 도착하는 게 빨랐다. 몇 명이 연달아 나왔다.
윤시하는 두 번 피했다. 박지훈 말이 맞았다. 각도를 봐야 했다.
세 번째는 맞았다. 허벅지 쪽이었다. 강수현이 던진 공이었다. 예상보다 낮은 궤도로 왔다.
"아웃."
선생님이 불렀다.
밖으로 나왔다. 코트 선 밖에 서서 보는 구역이었다. 거기 이미 다른 애들 몇이 서 있었다. 탈락한 순서대로 서 있는 구역이었다.
그 중 하나가 2학년 5반 남자애였다.
이름을 알지 못했다. 보름 전쯤 복도에서 강수현이랑 뭔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몰랐다. 박지훈이 그 반에 선생님이 뒤에서 지켜보는 줄 알고 조용해진 거라고 말한 적 있었다. 그 뒤로 다시 봤을 때 눈을 피했다는 것도. 그 남자애가 지금 코트 밖 구역에 서 있었다.
처음엔 그쪽에서 말을 걸 거라고 생각 못 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서 있었으니까.
처음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공이 날아가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선생님은 코트 안을 보고 있었다. 코트 밖 구역은 선생님 시야에서 약간 비켜난 쪽이었다.
"강수현이랑 친해?"
남자애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대화를 시작하는 것처럼.
"아뇨."
"근데 편의점 자주 같이 있던데."
"같이 있었던 적 없어요."
"아니, 봤는데."
윤시하가 그쪽을 보지 않으면서 대답했다.
"보신 게 잘못 보신 거예요."
"아, 그래?" 남자애가 슬쩍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강수현이 그쪽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 얘기가 좀 돌더라고."
"그 얘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지금 저한테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왜 예민하게 굴어."
"예민한 게 아니에요."
목소리를 높인 게 아니었다. 그냥 말했다. 그게 더 단호하게 들렸는지, 남자애가 잠깐 멈췄다.
그리고 반발했다.
"어이없네, 진짜." 목소리가 달라졌다. "전학 온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어디서."
말 끝에 손이 왔다.
어깨를 밀려는 동작이었다. 강하게는 아니었다. 짜증의 표현 같은 것이었다. 그냥 밀쳐내는 쪽. 그런데 왔다.
그 손이 닿기 전에 다른 손이 먼저였다.
강수현이었다.
코트 안에 있어야 할 강수현이 어느 샌가 코트 선 밖에 서 있었다. 언제 나왔는지 몰랐다. 공이 날아가던 도중이었는지, 아웃이 됐는지. 그냥 거기 있었다. 남자애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공중에서 멈춘 것처럼.
말이 없었다.
그냥 잡고 있었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코트 밖에 서 있던 아이들이 봤다. 코트 안쪽에서도 몇 명이 이쪽을 봤다. 공이 날아가다가 잡히지 않고 바닥에 구르는 소리가 났다.
강수현이 남자애를 봤다.
눈이 직선이었다. 화가 난 것 같은 눈이 아니었다. 그냥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이 더 무거웠다.
"건드리지 마."
세 글자였다.
낮고 조용했다. 주변이 시끄러웠는데 그 세 글자만 선명하게 들렸다. 선생님도 돌아봤다.
남자애가 손을 내렸다. 강수현이 잡은 걸 놓았다. 남자애가 시선을 피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다. 빠르게. 말이 없었다.
강수현이 윤시하를 봤다.
"괜찮아?"
"응."
"어디 맞은 거 없어?"
"공에 한 번 맞았는데, 그건 피구라서."
강수현이 잠깐 윤시하를 봤다가 코트 쪽으로 돌아서려고 했다.
"고마워."
뒤에서 윤시하가 말했다.
강수현이 멈췄다.
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거기 멈춰 있었다. 한 박자.
바람이 지나갔다. 운동장 모래가 조금 날렸다.
그리고 다시 코트로 들어갔다.
선생님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강수현, 코트 밖에 나왔으면 아웃이야."
"알겠어요."
강수현이 코트 밖 구역으로 나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서 경기를 봤다.
코트 안에서 피구가 다시 시작됐다. 그런데 주변 아이들 시선이 한 방향에서 오래 있었다. 강수현 쪽에, 윤시하 쪽에. 말이 없는 것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윤시하 옆으로 누군가 왔다.
김하늘이었다.
언제 코트 밖으로 나온 건지 몰랐다. 아웃이 됐는지, 스스로 나왔는지.
"괜찮아?"
"응."
"봤어. 아까."
김하늘이 잠깐 주변을 봤다. 아이들 시선이 아직 이쪽에 있었다. 강수현 쪽에, 윤시하 쪽에.
김하늘이 윤시하 팔을 잡았다.
부드럽게. 그런데 분명하게.
"나 잠깐 음수대 가. 같이 가."
아이들 보는 앞에서였다. 열 명이 넘는 아이들이 코트 밖에 서 있었다. 그 앞에서 윤시하 팔을 잡고 걸어가는 것. 강수현이 그 장면을 봤다. 표정이 없었다. 그냥 봤다.
음수대는 운동장 옆 벽 쪽에 있었다. 사람들 시선이 멀어졌다. 둘이 걷는 소리만 났다. 체육복 신발이 운동장 모래를 밟는 소리.
"이제 나도 좀 숨길 생각 없거든?"
걸어가면서 김하늘이 말했다. 윤시하한테 하는 말인지 자기 자신한테 하는 말인지 모를 소리였다. 작게 말했는데 윤시하한테는 들렸다.
"뭘요."
"신경 쓰인다는 거."
목소리가 낮아졌다. 학교에서 김하늘이 이런 목소리를 낸 게 처음이었다. 조율된 목소리가 아닌, 그냥 나오는 목소리. 웃음이 없는 목소리.
"강수현이 먼저 나선 거 봤어. 그게." 김하늘이 잠깐 멈췄다가. "그게 약간 나를 자극했어."
"자극이라는 게."
김하늘이 앞을 보면서 걸었다.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음수대 앞에 멈췄다.
김하늘이 물을 마셨다. 윤시하도 마셨다. 찬물이었다. 체육복을 입어서 운동장에서 조금 달려다녔더니 목이 말랐다.
"그래서 팔 잡았어요?"
"응."
"아이들 다 보는 데서."
"그러게." 김하늘이 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생각하고 한 게 아니야. 그냥 했어."
그 말이 진짜 같았다. 계산이 있는 사람이 계산 없이 한 말처럼 들렸다.
멀리서 피구 공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이 뭔가를 외치는 소리도.
"오늘 다음부터 학교 분위기 달라질 것 같아."
김하늘이 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왜요."
"강수현이 공개적으로 나섰잖아. 나도 공개적으로 움직였고. 그게 같은 날이야." 김하늘이 윤시하를 봤다. 그 눈이 오늘은 달랐다. 웃음이 없는 눈이었다. 웃음을 지운 게 아니라 원래 없는 것 같은 눈. "다들 알아. 이게 뭔지."
윤시하는 그 말을 들으면서 멀리 운동장을 봤다.
강수현이 코트 밖에 서서 경기를 보고 있었다.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강수현이 먼저 시선을 내렸다.
피구가 다시 시작됐다.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아이들이 다시 움직였다.
윤시하는 운동장으로 걸어 돌아갔다.
오늘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정리됐다. 남자애의 손이 왔고, 강수현이 먼저 막았다. "건드리지 마." 세 글자. 그리고 김하늘이 팔을 잡고 음수대로 데려갔다. 아이들이 전부 봤다.
둘 다, 같은 날, 공개적으로 움직였다.
박지훈이 옆에 왔다.
"야."
"응."
"오늘 진짜로 학교 분위기 바뀔 것 같다."
"알아."
"어떻게 할 거야."
윤시하가 운동장 바닥을 내려다봤다.
모래가 바람에 조금씩 날렸다. 3월 마지막 날이었다. 내일이면 4월이었다.
"아직 몰라."
"그게 제일 위험한 대답이야."
"알아."
박지훈이 더 말하지 않았다. 뭔가를 더 말할 것 같았는데 안 했다. 그냥 옆에 서서 경기를 봤다.
체육 수업이 끝났다.
선생님이 정리를 시켰다. 공을 챙기고, 라인 콘을 걷고, 두 줄로 서서 다시 교실로 들어가는 순서였다. 아이들이 움직이면서 이야기 소리가 커졌다. 오늘 경기 얘기, 누가 잘했다는 얘기, 맞은 자리가 아프다는 얘기.
윤시하는 줄에 서면서 운동장을 한 번 봤다.
강수현이 코트 쪽에서 공을 챙기는 걸 도와주고 있었다. 선생님이 시킨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냥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이 하는 것처럼. 그게 강수현의 방식이기도 했다.
교실로 돌아오는 복도에서 강수현과 마주쳤다.
계단에서였다. 올라가는 방향이 같았다. 강수현이 한 칸 앞이었다. 체육복을 입은 채로 가방을 들고 있었다. 뒤에서 보면 그냥 평소처럼 보였다. 아까 있었던 일이 없는 것처럼.
아무 말도 없이 올라갔다. 강수현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윤시하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는 소리, 다른 아이들 발소리, 복도에서 서로를 부르는 소리들이 그 사이를 채웠다.
2층에서 방향이 나뉘었다.
강수현이 교실로 들어가면서 잠깐 멈췄다.
문 앞에서.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한 박자.
그리고 들어갔다.
윤시하는 그 뒷모습을 봤다.
아까 건드리지 마, 라고 했던 목소리가 돌아왔다. 낮고 조용하고 선명했던 그 세 글자. 손목을 잡고 말을 한 다음에 바로 괜찮냐고 물었다. 그 순서가 맞는 것 같았다. 설명이 없었다. 왜 나왔는지, 언제부터 봤는지. 그냥 거기 있었고, 막았다. 그게 강수현의 방식이었다.
자기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 안이 조금 달랐다. 아이들이 분명히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직접 말을 하는 건 아닌데, 시선의 방향이 달랐다. 이수빈이 창가 자리에서 뭔가를 핸드폰에 보내고 있었다. 빠르게. 김하늘은 자기 자리에 앉아서 교과서를 펴고 있었다. 표정이 없었다. 아까 음수대에서 했던 말이 아직 그 표정에 있는 것 같았다.
박지훈이 자리에 앉으면서 작게 말했다.
"오늘부터야."
"뭐가."
"삼각관계 학교 공식화."
윤시하가 자리에 앉으면서 박지훈을 봤다.
박지훈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웃는 쪽이 아니었다.
"야. 이제 중립 없어. 반에서 어느 쪽이든 줄을 세우려는 사람이 생길 거야. 조심해."
"어떻게 조심해."
"모르겠어. 그냥 조심해."
도움이 안 되는 말이었다. 그런데 맞는 말이었다.
창밖으로 운동장이 보였다. 애들이 아직 들어오는 중이었다. 체육복 외투를 벗는 애들이 있었다. 바람이 좀 잦아든 것 같았다. 운동장 위로 3월 마지막 오후 햇살이 비스듬하게 깔렸다.
내일이면 4월이었다.
달라지는 건 달력뿐인 것 같았는데, 오늘 뭔가 달라진 것 같았다.
박지훈이 옳았다. 이제 달라진다. 모래가 지금 운동장 위에서 날리고 있는 것처럼,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되돌릴 수 없는 것.
종례 종이 울렸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반 단톡이었다. 이수빈이 올린 글 하나. "오늘 체육 시간 하이라이트 ㅋㅋ" 사진은 없었다. 대신 읽은 사람 수가 올라가는 게 보였다.
교실 문이 열렸다. 강수현이 지나갔다. 복도에서 잠깐 멈췄다가, 안을 한 번 봤다.
윤시하를 봤다.
"내일 봐."
그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4월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