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계약
블랙홀 본사를 나서자 바람이 차가웠다.
1월 1일의 서울. 간선도로에는 차가 거의 없었다. 사람도 없었다. 새해 첫날 아침의 서울은 비워진 무대 같았다. 조명이 꺼지고 관객이 빠져나간 뒤의 무대. 이준은 그런 무대를 좋아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는 표정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도윤이 차 문을 열었다. 이준은 타지 않았다.
"걸어갈게."
"…네?"
본사에서 한남동 자택까지 차로 15분. 걸으면 한 시간. 이준은 코트 깃을 세우고 걷기 시작했다. 1월의 바람이 목을 스쳤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도윤이 뒤에서 차를 몰며 따라올 것이었다. 7년째 그래 왔으니까. 이준이 걷겠다고 하면 도윤은 20미터 뒤에서 천천히 차를 몬다. 말로 정한 적은 없었다. 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7년이었다. 그 7년 동안 도윤이 먼저 거리를 좁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준은 그 절제를 신뢰했다.
주머니 속에 봉투가 있었다. 투명한 봉투. 아까 대표실에서 집어 든 것이 이제야 손에 잡혔다. 열두 페이지. 무게는 가벼웠다. 누군가의 6개월치 인생이 담겨 있기에는 너무 가벼웠다.
한남대교 남단 인도를 걸었다. 이 시간에 이 길을 걷는 사람은 없었다. 파파라치도 새해 첫날 아침에는 쉬었다. 보통은. 이준은 '보통'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보통에 기대면 구멍이 생긴다. 구멍이 생기면 기사가 된다. 15년 동안 그 규칙 하나로 살아왔다.
봉투를 꺼냈다. 걸으면서 읽기 시작했다.
1페이지. 계약 당사자. 갑: 블랙홀 엔터테인먼트. 을: 강이준. 병: 서은아. 세 개의 이름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병. 이 계약에서 그녀의 위치는 '병'이었다. 갑도 을도 아닌, 세 번째. 이름조차 '병'으로 불리는 사람. 그 단어가 눈에 오래 머물렀다.
2페이지. 계약 목적. '갑의 소속 아티스트(을)의 이미지 관리를 위한 공개 연애 시뮬레이션.' 시뮬레이션. 박대건다운 단어 선택이었다. 위장이라고 쓰면 법적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시뮬레이션이라고 쓰면 컨설팅 계약이 된다. 단어 하나로 성격이 바뀌는 문서.
3페이지부터 5페이지는 행동 규칙이었다. 손잡기 주 2회, 카페 데이트 주 1회, 기자 노출 월 2회. 숫자로 정리된 연애. 스프레드시트 같았다.
6페이지. 금지 조항. '감정적 교류에 의한 계약 변경은 인정하지 않는다.' 마지막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박대건이 직접 그은 것이었다. 망설임 없이 한 번에 그은 선. 그 문장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였다.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뜻이니까.
7페이지에서 9페이지. 위약금. 을의 위반 시 계약금 3배. 병의 위반 시 잔여 채무 전액 즉시 상환. '잔여 채무.' 5억. 그 숫자가 이 계약서의 진짜 서명란이었다. 서명을 하기 전에 이미 서명된 계약서.
10페이지. 종료 조건. '갑의 판단에 의한 조기 종료 가능.' 을에게도 병에게도 종료 권한은 없었다. 이 계약서에서 사람은 갑뿐이었다. 나머지는 조건이었다.
11페이지와 12페이지. 서명란. 세 칸. 아직 어디에도 서명은 없었다.
이준은 봉투를 접어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한남대교를 다 건넜다. 도윤의 차가 20미터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한강 위에 아침 햇살이 떨어졌다. 겨울 한강은 색이 없었다. 회색 물 위에 회색 하늘. 그 사이를 걷는 것은 명상 같기도 하고, 도주 같기도 했다. 이준은 명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핵심은 세 가지였다. 첫째, 이 계약은 박대건의 것이다. 을도 병도 아닌 갑의 계약. 둘째, 서은아는 선택지가 없다. 5억이 선택을 대신한다. 셋째,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이준 자신이었다. 그리고 이미 선택했다.
☆
자택 앞에 도착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이준은 모르는 번호를 받지 않았다. 7년 동안 그래 왔다. 모르는 번호는 기자이거나 팬이거나, 어느 쪽이든 받아서 좋을 일이 없었다. 번호를 무시하고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려는데 3초 후에 문자가 왔다.
[최지훈입니다. 팩트인사이트. 새해 인사 겸 한 가지만 확인하고 싶습니다.]
최지훈. 이준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연예부 기자 중 가장 정확한 사람. 다른 기자들이 루머로 기사를 쓸 때, 최지훈은 팩트로 기사를 썼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루머는 부인하면 되지만 팩트는 부인할 수 없으니까. 오늘 새벽 기사의 바이라인도 최지훈이었다. 〔단독〕 강이준, 열애 인정.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도윤에게 말했다.
"최지훈이라는 기자 알아?"
도윤이 운전석에서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팩트인사이트요? 알죠. 연예부 에이스. 오보율 거의 제로예요. 업계에서 제일 상대하기 어려운 기자."
"오늘 기사, 그 사람이야?"
도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형, 그 기자가 쓴 거면… 사진이 진짜라는 뜻이에요. 최지훈은 가짜로 기사 안 써요."
사진은 진짜였다. 자신이 운전석에 앉아 있던 것은 사실이니까. 문제는 조수석이었다. 모르는 얼굴. 최지훈이 기사에 이름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확인 중이라는 뜻이었다. 그 빈칸이 이준에게는 시간이었다.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최지훈.
[강이준 씨. 조수석 여성의 신원은 확인 중입니다. 24시간 안에 후속 기사를 쓸 예정입니다. 사전 코멘트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24시간. 이준은 손목시계가 없는 왼쪽 손목을 보았다. 습관이었다. 시계는 서재에 두고 나왔다. 도윤의 차 시계를 보았다. 오전 9시 12분. 내일 오전 9시까지. 그 안에 위장 열애의 틀이 완성되어야 했다. 사진 속 여자가 누구든, 내일부터는 서은아여야 했다.
시간표가 바뀌었다. 모레가 아니라 오늘이었다. 박대건에게 전화했다.
"일정을 당겨야 합니다. 최지훈이 24시간 줬습니다."
3초의 침묵. 박대건은 3초 안에 모든 것을 계산하는 사람이었다.
"오늘 두 시. 누아르. 당길 수 있어."
"괜찮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도윤이 옆에서 듣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7년 동안 봐온 얼굴 중에 가장 창백한 얼굴이었다.
"형, 누구 만나는 거예요? 제발 말해주세요."
이준은 현관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두 시에 누아르. 시크릿 룸."
도윤은 더 묻지 않았다. 7년 동안 배운 것이 있다면, 이준이 말하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
오전 10시. 서재에 앉아 태블릿을 켰다.
'서은아'를 검색했다. 걸그룹 루나틱. 데뷔 7년 차. 리더. 메인보컬. 최근 컴백 실패. 멤버 탈퇴. 소속사 경영난. 해체설. 검색어 자동완성에 '루나틱 해체', '서은아 빚', '루나틱 공중분해'가 떴다. 키워드 하나하나가 추락의 기록이었다. 이 업계에서 검색어 자동완성은 평판의 묘비명 같은 것이었다. 한번 새겨지면 지워지지 않는다.
이미지를 검색했다. 무대 위의 사진이 먼저 나왔다. 강한 조명 아래의 강한 눈빛. 센터에 선 여자.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도전이 있었다. 3년 전 사진이었다.
무대 아래 사진은 달랐다. 공항 출국 사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걷는 모습. 어깨가 좁았다. 무대 위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었다.
기사를 읽었다. 데뷔 당시 '차세대 디바', '4세대 대표 걸그룹'. 3년 전부터 '성적 부진', '팬덤 이탈', '소속사 방치'. 단어들의 궤적이 선명했다. 위에서 아래로.
유튜브에서 연습실 영상을 찾았다. 조회수 47만. 2년 전 업로드. 좁은 연습실에서 다섯 명이 춤을 추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그들의 얼굴은 진지했다. 센터의 서은아가 동작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막내가 박자를 놓친 것이었다. 서은아가 막내의 어깨를 잡고 뭔가를 말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막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음악이 시작되었을 때 — 서은아는 센터가 아니라 막내 옆에 서 있었다.
이준은 그 장면을 두 번 보았다. 두 번째는 서은아의 눈만 보았다. 막내의 어깨를 잡는 순간의 눈. 무대 위 사진의 도전적인 눈이 아니었다. 다른 종류의 빛이었다. 이준은 그것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다만, 영상 마지막에 서은아가 거울을 보는 장면이 있었다. 다섯 명의 연습이 끝나고 멤버들이 물을 마시러 나간 뒤, 텅 빈 연습실에서 혼자 거울 앞에 서 있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카메라 각도 때문에. 하지만 어깨가 내려와 있었다. 아까 막내 옆에서 펴고 있던 그 어깨가.
빚 5억. 숫자는 어떤 기사에도 나오지 않았다. 박대건이 알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깊이 조사했다는 뜻이었다. 혹은 빚의 채권자가 박대건과 연결되어 있거나.
이준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천장을 보았다. 선택지가 없는 사람과 계약을 한다는 것.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 업계에서 선택지가 없는 사람은 두 종류였다. 무너지는 사람이거나, 무너지지 않으려고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거나. 서은아가 어느 쪽인지는 두 시에 알게 될 것이었다.
팬카페에 들어가 보았다. 회원 수 12만. 활동 중인 회원은 2천도 안 되었다. 최근 게시글. '은아야 힘내.' '루나틱 영원히.' 글 사이사이에 빈 공간이 많았다. 팬카페의 빈 공간은 떠난 사람들의 흔적이었다. 12만에서 2천. 나머지 11만 8천은 어디로 갔을까. 이준은 그 숫자를 기억해두었다.
시계를 보았다. 11시 23분. 2시간 37분.
옷장을 열었다. 오늘의 이미지를 설계해야 했다. 첫인상은 3초 안에 결정된다. 그 3초를 위해 30분을 쓰는 것은 낭비가 아니었다. 투자였다. 검은 터틀넥을 골랐다. 차콜 코트. 시계는 빼기로 했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사람처럼 보여야 했다. 실제로는 24시간 카운트다운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거울 앞에 섰다. 이 얼굴이 오늘 서은아 앞에 앉을 것이었다. 5억의 빚을 진 사람 앞에. 이 얼굴이 어떤 의미로 읽힐지 이준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압도. 위압. 거리. 그래서 시계를 빼기로 한 것이었다. 한 가지라도 빈틈을 보여줘야 사람은 계약서에 서명한다. 완벽한 사람 앞에서는 서명 대신 도주를 선택하니까.
이준은 거울 속의 자신을 3초간 보았다. 충분했다. 거울에서 눈을 떼기 전에 한 가지를 더 확인했다. 눈. 차가웠다. 새벽 세 시에 창문에 비친 눈과 같았다. 통제되고 있었다. 그것으로 됐다.
☆
오후 1시 40분. 누아르.
청담동 뒷골목의 프렌치 레스토랑. 미슐랭 원 스타. 시크릿 룸은 지하에 있었다. 계단으로만 내려갈 수 있었다. 계단이 좁았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너비. 의도된 설계였다. 이 레스토랑의 시크릿 룸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서울에 열 명 남짓이었다. 박대건이 그중 하나였고, 이준은 박대건의 이름으로 빌리는 사람이었다.
"형."
이준이 차에서 내리려다 멈췄다.
"조심해요."
도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이준은 도윤을 보았다. 7년 동안 봐온 얼굴. 걱정할 때의 표정을 알고 있었다. 입술이 살짝 다물리고 눈썹 사이가 좁아지는 것. 7년 전 처음 매니저가 되었을 때부터 같은 표정이었다. 이준은 그 일관성이 편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안전했으니까.
"걱정 마."
차에서 내렸다. 유리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검은 터틀넥, 차콜 코트, 시계 없는 손목. 설계한 대로였다.
지하로 내려갔다. 계단은 12개. 벽은 어두운 벽돌. 와인 저장고를 개조한 공간이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바깥의 소리가 사라졌다. 청담동의 차 소리, 사람 소리, 세상의 소리. 12개의 계단이 그 모든 것을 차단했다. 마지막 계단을 밟았을 때 완전한 정적이었다. 이 정적 속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서로의 목소리만 들린다는 것. 시크릿 룸이라는 이름에는 그런 의미가 있었다.
문을 열었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검은 니트에 청바지. 화장기 없는 얼굴. 테이블 위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반쯤 녹아 있었다. 일찍 온 것이었다. 20분 정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반쯤 녹는 시간. 이준은 그런 것을 계산하는 사람이었다.
문 앞에서 3초간 보았다. 3초면 충분했다. 사진에서 본 얼굴이 아니었다 — 사진보다 작았다. 어깨도, 손도, 테이블 위에 놓인 손가락도. 무대 위의 '걸그룹 루나틱 리더 서은아'와 눈앞의 사람 사이에는 두 사람 이상의 거리가 있었다.
아까 태블릿에서 본 무대 위 사진의 얼굴. 공항 사진의 얼굴. 연습실 영상의 뒷모습. 그리고 지금 눈앞의 얼굴. 네 개의 이미지가 겹쳤다가 흩어졌다. 하나의 사람에게서 네 개의 인상을 읽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