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금이 간 가면
밤의 타워는 낮보다 솔직했다.
형광등이 절반만 켜진 복도는 낮의 광택을 벗고 있었다. 대리석 바닥의 반사가 흐려지고, 유리벽 너머의 서울은 야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빌딩의 불빛들이 흩어져 있었지만, 도현은 그것을 보지 않았다.
보안 카드를 리더기에 댔다. 삐. 초록 불. 37층 기획조정실 서버 구역 앞.
새벽 1시. 야근 불빛만 남은 타워. 경비 교대 시간. 이 시간대에 37층에 올라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도현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3년간 이 건물의 보안 체계를 관리한 사람이니까.
혼자 확인한다.
어제 내린 결론이 오늘 발이 되었다. 이준을 병원에 두고 왔다. 퇴원 전 마지막 진료 일정을 핑계로. 이 남자의 반 걸음 없이 타워에 들어온 것은 납치 이후 처음이었다. 등이 차가웠다.
도현은 서버 구역의 문을 열었다.
*
서버룸은 차가웠다.
냉각 팬의 저음이 방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서버 랙의 LED가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도현은 그 규칙에서 안정을 느꼈다. 기계의 규칙은 사람의 규칙보다 믿을 수 있었다.
단말기 앞에 앉았다. 기획조정실장 권한으로 로그인했다. 접근 등급이 '제한적 열람'으로 낮아져 있었지만, 블랙팀 서버의 접근 이력 자체는 조회 가능했다. 박성호가 차단한 것은 '내용'이지 '이력'이 아니었다. 그 차이를 놓친 것이다. 혹은 시간이 부족했거나.
화면에 블랙팀 보안 서버 접근 이력이 떴다.
목적: GPS 관제 모듈 접근 이력 추적. 범위: D-7 ~ D-1.
도현은 납치 당일을 찾지 않았다.
당일은 너무 뻔하다. 이미 정리되어 있을 것이다.
대신 D-7부터 D-1까지. 납치 일주일 전의 접근 기록을 불러냈다.
펜을 꺼냈다. 왼손. 오른손 봉합이 아직 당겼다. 리갈 노트를 무릎 위에 펼쳤다. 화면의 숫자를 노트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D-7. 접근 3건. 박성호. 김재훈. 오영민.
D-6. 접근 2건. 박성호. 이준.
D-5. 접근 4건. 박성호. 김재훈. 오영민. 이준.
D-4. 접근 2건. 박성호. 김재훈.
D-3. 접근 3건. 박성호. 오영민. 이준.
여기까지는 정상이었다. 블랙팀 서버에 접근 권한자가 일상적으로 접속하는 패턴. 이상할 것이 없었다.
D-2.
도현의 펜이 멈췄다.
접근 0건.
하루 전체가 비어 있었다. 네 명 중 누구도 서버에 접근하지 않았다. 납치 이틀 전. 도현은 D-2의 빈칸을 3초간 보았다.
0건이 문제가 아니다.
0건이 되도록 '만든' 것이 문제다.
블랙팀 보안 서버는 일일 필수 로그인 시스템이 걸려 있었다. 도현이 직접 설계한 규정. 매일 최소 1회, 담당자가 서버 상태를 확인하고 로그를 남기도록 되어 있었다. D-2에 접근 0건이라는 것은——
규정 위반이거나, 로그가 삭제된 것이거나.
도현은 삭제 흔적을 확인했다. 로그 테이블의 시퀀스 넘버를 추적했다. D-1의 첫 번째 로그 시퀀스가 D-3 마지막 로그에서 4 건너뛰어 있었다. 사이에 네 개의 기록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네 개가 삭제되었다는 뜻이었다.
지워진 건 기록이 아니라, 의도다.
*
D-1.
납치 하루 전. 도현은 화면을 스크롤했다.
접근 2건.
박성호. 오전 9시 12분.
그리고——
접근 계정: BK-04.
시간: 오후 11시 47분.
접근 구역: GPS 관제 모듈.
작업 내용: 위치 추적 파라미터 수정.
BK-04. 블랙팀 네 번째 계정. 도현은 그 계정이 누구에게 배정되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접근 권한자 목록에서 네 번째 이름.
오영민. 기획조정실 보안 담당.
도현의 맥박이 올라갔다. 짚지 않아도 느꼈다. 목에서 뛰고 있었다.
위치 추적 파라미터 수정. 납치 하루 전 밤 11시 47분에. 정규 근무 시간이 아니었다. GPS 관제 모듈에 접근했다는 것 자체가——
도현은 노트에 적었다. 왼손 글씨가 떨렸다. 흥분이 아니었다. 공포도 아니었다. 확신의 떨림이었다. 퍼즐의 조각이 자리를 찾을 때의 감각.
그런데 멈췄다.
화면 하단. 접근 로그 아래에 작은 기록이 하나 더 있었다.
시스템 경고: GPS 관제 모듈 접근 중 이중 세션 감지.
동시 접속 계정: BK-04, BK-03.
BK-03.
블랙팀 세 번째 계정.
이준.
같은 시간대에, 같은 모듈에, 두 계정이 동시 접속했다.
오영민이 GPS를 건드릴 때, 이준도 그 모듈 안에 있었다.
도현의 손이 멈췄다. 펜이 노트 위에 고정된 채. 화면의 글자가 선명했다. BK-03. BK-04. 동시 접속.
이준은 알고 있었다.
오영민이 GPS를 건드리는 것을. 같은 시간, 같은 모듈 안에서.
막았나. 방조했나. 공모했나.
서버룸의 냉각 팬이 울렸다. 도현의 심장이 뛰었다. 빠르게. 그런데 이번에는 공포가 아니었다. 공포보다 선명한 것이 있었다. 배신이라는 단어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30센티미터의 밤. 호흡을 세던 새벽. 손목을 붙잡았던 꿈. 그 모든 것의 밑바닥에 BK-03이라는 문자가 깔려 있었다.
*
그때, 서버룸의 공기가 바뀌었다.
냉각 팬의 저음 사이로, 다른 감각이 끼어들었다. 발소리가 아니었다. 공기의 밀도가 변하는 것. 문이 열리지 않았다. 열린 채였다——도현이 닫지 않았다.
등 뒤에 인기척이 있었다.
도현은 화면을 끄지 못했다. 끄려면 키보드로 손이 가야 하고, 키보드로 가면 등 뒤의 존재에게 등을 완전히 보여야 한다. 대신 왼손으로 모니터 각도를 살짝 꺾었다. 화면이 반사각에서 벗어났다.
"가시죠."
이준의 목소리.
낮고, 건조하고, 감정이 없는. 도현은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두 가지를 동시에 느꼈다. 안도와 공포. 안도는——이준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고. 공포는——이준이 여기 있다는 것의 의미 때문이고.
이 남자는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병원에 두고 왔다. 진료 일정을 핑계로. 그런데 이 남자는 여기에 있다. 새벽 1시의 37층 서버룸에. 타이밍이 너무 정확했다. 우연이라 부르기에는.
"얼마나 봤어." 도현이 물었다. 화면을 보며.
"보지 않았습니다."
"그건 네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이준이 침묵했다. 1초. 도현에게 그 1초는 길었다. BK-03이라는 문자가 아직 망막에 남아 있었다.
"도련님. 이 시간에 서버 구역 접근은 보안 알림이 발생합니다. 3분 내로 경비가 올라옵니다."
사실이었다. 도현은 그것을 알면서도 왔다. 3분. 충분했다. 이미 본 것은 봤다.
도현은 화면을 껐다. 모니터가 검어졌다. 검은 화면에 도현의 얼굴이 반사되었다. 형광등 아래의 얼굴. 금이 간 표정. 0.5초 보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
서버룸을 나왔다.
복도가 어두웠다. 야간 조명만 남은 37층. 이준이 반 걸음 뒤에서 따랐다. 항상 그 거리.
도현은 걸으면서 노트를 닫지 않았다. 왼손에 쥔 채 걸었다. D-2의 빈칸. D-1의 BK-04. 그리고 BK-03. 두 계정의 동시 접속. 모든 글자가 손바닥 위에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췄다.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유리벽 너머의 야경이 어두운 복도에 희미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이준."
"예."
도현은 돌아보지 않았다. 유리벽에 비친 이준의 윤곽을 보았다. 넓은 어깨. 내리깔은 시선. 반 걸음 뒤.
질문이 목까지 올라왔다. '너는 알고 있었어?' 그 문장이 혀 끝에 닿았다가, 삼켜졌다. 지금은 아니었다. 증거가 더 필요했다. 감정이 아니라 팩트로 물어야 했다. 도현은 차도현이니까.
"보고 준비는 됐어?"
"내일 오전까지 제출하겠습니다."
"비공식 경로라고 했어. 공식 보고에는 올리지 마."
"알겠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왔다. 문이 열렸다. 도현이 먼저 탔다. 이준이 뒤따랐다. 문이 닫혔다.
밀폐된 금속 상자 안에서 두 사람의 호흡이 겹쳤다. 도현은 이준의 호흡을 세지 않았다. 대신 노트를 쥔 왼손에 힘을 주었다.
도현은 확신했다. 이준은, 타이밍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모니터가 꺼졌는데도, 도현의 눈앞엔 'BK-03'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