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우아한 사람은 무너지지 않는다
목요일. 자선 행사 당일.
연화는 드레스룸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아이보리색 트위드 재킷, 실크 블라우스, 미디 스커트. 귀걸이는 진주. 목걸이는 없다. 정명희가 목걸이를 하면 며느리는 하지 않는다.
거울을 봤다. 옷이 아니라 갑옷이었다. 지금은 의식적으로 입는다. 배역이니까.
D-118.
호텔 연회장 입구에서 정명희가 먼저 서 있었다. 연화를 보자마자 시선이 내려갔다. 구두 끝에서 시작해 귀걸이에서 멈췄다. 0.5초. 사람들 앞에 내보내기 전 포장 상태를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왔니."
"어머니, 먼저 오셨군요."
"리스트 가져왔지?"
연화는 핸드백에서 프린트된 리스트를 꺼냈다. 정명희가 받아 들고 훑었다. 눈이 한 곳에서 멈췄다.
"7번 테이블. 김 사모님을 이쪽으로 옮겼네."
"네. 원래 배치대로면 대한건설 장 부사장님 부인과 같은 테이블이에요. 지난달 골프장에서 불편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정명희의 눈에 무언가가 스쳤다. 인정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이 며느리가 아직 쓸모 있다는 확인.
"잘했어. 나머지는?"
"기자단 입장 동선을 후원자 동선과 분리해놨어요."
정명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칭찬의 전부였다.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원형 테이블 15개. 꽃꽂이는 백합과 안개꽃. 연화는 테이블 사이를 걸으며 좌석 카드를 하나씩 확인했다. 이름, 직함, 위치. 카드를 넘길 때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거리가 읽혔다. 누가 누구 옆에 앉는지가 이 행사의 진짜 내용이었다. 꽃꽂이의 높이를 확인했다. 백합이 너무 높으면 맞은편 사람의 얼굴이 가려진다. 누구도 꽃 높이를 칭찬하지 않지만, 꽃이 높으면 불편했다는 말은 나온다.
1번 VIP 테이블의 마지막 좌석 카드. '서지혁, 법무법인 정연.'
손이 멈췄다.
이 이름이 여기 있을 줄은 몰랐다. 연화는 카드를 내려놓았다. 위치를 기억했다. 1번 테이블, 정명희 좌측 세 번째.
행사가 시작됐다. 오찬은 정명희의 인사말로 열렸다. 단상 위의 정명희는 품위 있었다. 이 여자의 공적인 모습은 완벽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다르다. 며느리의 출신을 식탁 위에 올리고, 부족함을 손님들 앞에서 교정하고, 침묵으로 서열을 확인시킨다. 체면을 무기로 쓰는 사람이었다.
며느리의 자리는 테이블이 아니었다. 동선 위였다. 테이블 사이를 돌며 인사하고, 와인을 확인하고, 불편한 게스트를 케어하는 것이 연화의 역할이었다. 연화는 테이블 사이를 지나며 게스트들의 손을 읽었다. 와인잔을 자주 드는 사람은 대화가 편한 사람이고, 잔에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은 빨리 나가고 싶은 사람이었다.
정명희가 연화를 불렀다.
"연화야."
사람들 앞이기 때문에 '연화야'였다. 둘만 있을 때는 '너'였다.
"이리 와봐. 손님들께 인사드려."
1번 테이블. 대한건설 회장 부인, 법조계 원로의 부인, 미술 재단 이사장. 그리고 좌측 세 번째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서른대 중후반. 양복은 네이비, 핏이 정확했다. 넥타이 매듭이 깔끔하되 너무 조이지 않았다. 이 테이블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와인잔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물잔만 절반쯤 비어 있었다. 얼굴에 표정이 적었다. 웃지 않았고, 불쾌하지도 않았다. 자리에 있되 자리에 묻히지 않는 사람.
정명희가 말했다.
"우리 며느리야. 오늘 행사 뒷바라지 다 했어."
'뒷바라지.' 운영이 아니라 시중. 기획이 아니라 수발. 연화가 한 일의 무게를 줄이는 단어였다. 웃었다.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모자란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고개를 숙였다. 전에는 굴복의 각도였다. 지금은 관찰의 각도였다. 고개를 숙인 채로 테이블 위를 봤다. 서지혁의 자리에는 명함도 서류도 없었다. 이 사람은 마시지 않고 앉아 있다.
고개를 들었다. 정명희에게 미소를 보내고 테이블을 떠났다.
디저트가 나올 무렵, 문제가 생겼다.
9번 테이블의 게스트가 와인을 엎질렀다. 흰색 린넨 위에 레드 와인이 퍼졌다. 호텔 직원이 달려왔지만, 와인을 엎지른 게스트가 목소리를 높였다. 남편 소유 건설사의 사모님이었다.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내가 엎지른 게 아니라 옆에서 팔꿈치가 닿은 거예요."
연화가 다가갔다.
"사모님, 죄송합니다. 자리를 바꿔드릴게요. 라운지 쪽에 따로 세팅해둔 테이블이 있어요."
"자리를 왜 내가 옮겨요?"
"드레스에 얼룩이 있으시잖아요. 라운지에 세탁 서비스가 준비되어 있거든요."
사모님의 눈이 좁아졌다.
"내가 왜 나가야 하는데. 옆 사람이 팔꿈치를 안 뻗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어요."
주변 테이블에서 시선이 몰리기 시작했다. 연화는 목소리를 한 톤 낮췄다. 사모님에게만 들리는 거리로 몸을 기울였다.
"정 이사장님이 이쪽을 보고 계세요. 자리에서 처리하시면 드레스 상태가 행사장 전체에 보입니다. 라운지에서 정리하시면 돌아오실 때 아무도 모릅니다."
사모님의 시선이 1번 테이블 쪽으로 갔다. 정명희가 있는 방향이었다. 표정이 바뀌었다. 체면이 이겼다.
"세탁 서비스가 있어요?"
"네. 이런 행사에서는 항상 준비해둬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호텔 컨시어지에게 5분 안에 준비시킬 수 있었다. 이 호텔에서 대한문화재단 행사를 세 번 치렀다. 컨시어지의 이름은 박 과장이었다.
연화는 호텔 직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직원이 멈칫했다. 세탁 서비스라는 말을 처음 듣는 표정이었다. 연화가 한 번 더 눈짓을 보냈다. 짧게. 단호하게. 직원이 움직였다. 사모님을 라운지로 안내했다.
복도에서 박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마디. "9번 테이블 게스트, 라운지, 드레스 케어."
박 과장의 대답도 세 마디였다. "3분 안에요."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9번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행사장 전체 분위기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1번 테이블을 봤다. 서지혁이 연화를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1초. 연화가 먼저 거뒀다.
게스트들이 하나둘 떠났다. 정명희가 연화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게스트는 없었다.
"9번 테이블 처리, 깔끔했어."
칭찬이 아니었다. 평가였다.
"별거 아니었어요."
"별것 아닌 걸 별것 아닌 것처럼 처리하는 게 네 일이지."
연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명희가 핸드백을 들며 말했다.
"요즘 좀 달라졌어."
"뭐가요?"
"눈이."
정명희의 시선이 연화의 눈에 머물렀다. 2초. 연화는 웃었다.
"행사 준비하느라 잠을 좀 못 잤어요."
정명희가 연화의 얼굴을 봤다.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다.
"잠 못 잔 눈은 아니던데."
그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 연화는 웃음을 유지한 채 그 등을 봤다. 이 여자는 그냥 넘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10년간 가둬둔 사람의 미세한 달라짐을 놓치지 않는다.
정명희가 떠났다. 빈 연회장에 서 있었다. 호텔 직원들이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꽃이 치워지고 린넨이 걷히고 좌석 카드가 수거됐다.
태욱은 오지 않았다. 정명희의 행사는 정명희의 영역이었고, 태욱은 어머니의 영역에 얼굴을 비추는 것을 귀찮아했다. 지금은 오지 않은 것이 나았다. 태욱이 없었기에 서지혁이라는 이름을 자연스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상담이 필요하시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낮은 목소리. 울림은 적고 전달은 정확한 톤. 돌아봤다. 서지혁이 연회장 출구 옆에 서 있었다. 양복 상의 단추를 하나 풀고 있었다. 떠나려다 멈춘 것인지, 처음부터 기다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실례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아까 행사장에서 보시는 눈이, 보통 손님 케어와는 좀 달라 보여서."
연화는 움직이지 않았다. 테이블 세 개 정도의 거리.
이 남자도 수집하고 있었다. 연화가 사람들의 손과 시선을 읽은 것처럼, 이 남자는 연화를 읽고 있었다. 읽히고 있다는 감각이 불쾌했다. 옷 안쪽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
"저는 대한그룹 며느리예요. 상담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가정 문제 상담을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서지혁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연화에게 건네지 않고.
"늦기 전에 오시죠."
서지혁이 돌아섰다. 연회장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연화는 테이블 위의 명함을 봤다. '법무법인 정연, 파트너 변호사, 서지혁.'
전에는 이 이름을 너무 늦게 알았다.
손을 뻗었다. 명함 가장자리에 손끝이 닿았다. 집어 들지 못했다. 1초. 유능한 사람이 건네는 호의가 가장 위험하다는 걸 전 타임라인에서 배웠다. 세나도 처음엔 호의였다. 이 남자가 정확히 무엇을 읽었는지 알 수 없었다. 며느리의 불안을 읽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읽은 것인지.
명함을 집었다. 핸드백 안주머니에 넣었다. 지퍼를 닫았다. 이 명함은 집에 가져가지 않는다. 아이클라우드에 찍히는 사진에도 남기지 않는다. 내일 서재 수첩에 번호만 옮긴 뒤 버린다.
빈 연회장에서 린넨이 걷히는 소리가 울렸다. 백합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밖으로 나왔다. 호텔 로비를 지나 정문으로 향했다. 8월의 오후 공기가 연회장보다 따뜻했다.
휴대폰이 울렸다. 문자. 태욱이었다.
'오늘 어디 있었어? 전화했는데 안 받던데.'
행사 중에 전화가 온 적은 없었다. 확인했다. 부재중 통화 없음. 전화를 하지 않고 전화했다고 말하는 것. 동선을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어머니 자선 행사요. 방금 끝났어요.'
답장을 보냈다. 화면을 끄려는 순간, 다른 알림이 떴다. 카카오톡.
오세나.
'연화야~ 잘 지내? 요즘 통 연락이 없어서. 커피 한잔 하자!'
연화의 엄지가 화면 위에서 멈췄다. 삭제 버튼 위에 손가락이 닿아 있었다. 손가락 끝이 화면 유리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2초. 호텔 정문 앞 햇살이 화면 위로 번져 글자가 흐려졌다.
누르지 못했다. 10년을 함께 버텼다고 믿었던 사람이니까.
화면을 껐다. 삭제하지 않았다. 답장도 하지 않았다.
핸드백 안에 명함이 있었다. 무게를 느낄 수 없는 얇은 종이. 하지만 연화는 그 무게를 알았다. 서초동까지의 거리를 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