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먼저 물어보는 사람이 지는 거야
3월 25일 수요일, 오후 4시 12분.
오늘 하교 후 달빛 편의점에 들를 생각은 없었다.
윤시하는 교문을 나오면서 가방 끈을 고쳐 멨다. 어제 오늘 이틀 연속이면 지나치게 노골적인 것 같았다. 아무리 동선상에 있다고 해도. 아무리 자연스럽다고 해도. 강수현이 오늘 수요일이라 학교 끝나고 바로 온다고 했고, 그걸 알고 또 가면.
"같이 가?"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김하늘이었다. 우산 없이. 오늘은 맑았다. 교복이 오늘도 칼같이 단정했다. 학원 가방이 아닌 학교 가방만 들고 있었다. 학원이 오늘은 늦게 시작하는 날인 것 같았다.
"응."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언덕 위에서 바람이 내려왔다. 3월 말의 바람이었다. 아직 차갑지만 더는 시리지 않은. 교문 밖 인파가 좌우로 흩어지면서 언덕으로 이어졌다. 아이들이 학원 방향, 집 방향으로 나뉘었다.
"어제 수빈이가 말 걸었다고 들었어."
"들었어요."
"직접 물어보는 게 나았나."
김하늘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윤시하한테 하는 건지 자기한테 하는 건지 경계가 불분명했다.
"어떤 쪽이 나은 거예요?"
"음." 김하늘이 걸으면서 잠깐 멈췄다. "둘 다 결국 드러나긴 해."
"둘 다 드러나는 거네요."
"그렇긴 한데." 김하늘이 윤시하를 봤다. "드러나는 방식이 달라."
"어떻게 달라요."
김하늘이 대답 대신 윤시하를 봤다. 잠깐. 그리고 앞을 다시 보면서 걸었다.
"어느 쪽이 더 좋아요."
김하늘이 잠깐 생각했다.
"지금 이 대화에서 내가 지고 있는 것 같아."
"왜요."
"내가 말하게 만들고 있잖아, 네가. 먼저 물어보는 사람이 지는 거야, 이런 거."
윤시하가 앞을 보면서 걸었다. 김하늘이 웃었다. 아까 편의점에서 처음 봤던 것 같은 웃음, 연습이 빠진 쪽이었다.
"솔직하게 물어볼게."
"응."
"강수현이랑 친해?"
윤시하가 언덕 경사를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친하다는 게 어떤 기준인지 몰랐다. 말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같이 뭔가를 한 것도 없었다. 삼각김밥을 받은 적 있고, 우산을 받은 적 있고, 어젯밤에 라면 먹으면서 대화를 한 적 있었다. 학교에서는 마주치면 봤고, 피한 적도 없었다.
"모르겠어."
"모른다는 게 아니라는 거야, 맞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예요."
김하늘이 그 대답을 듣고 잠깐 걸음이 느려졌다가 다시 빨라졌다.
"수빈이 말로는 달빛 편의점에서 셋이 같이 있었다고."
"같이 있었다기보다 공간이 겹쳤어요."
"그 공간이 자꾸 겹치는 거잖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윤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달빛 편의점이 보였다.
언덕 중간이었다. 간판에 오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오늘은 들르지 않으려고 했는데.
"편의점 들를 거야?"
김하늘이 먼저 물었다.
"오늘은 그냥 지나가려고."
"나는 들를 건데."
잠깐 생각했다.
"같이 들를게요."
편의점 문을 밀었다.
냉장고 소리가 먼저 들어왔다. 점원이 카운터 안에서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강수현은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수요일이어도 오후 4시면 아직 올 시간이 아니었다. 학원 끝나고 오는 거니까 빨라도 5시는 넘어야 했다.
김하늘이 냉장고 쪽으로 갔다. 윤시하도 따라갔다. 냉장고 문이 열렸다. 차가운 공기가 나왔다. 음료들이 줄지어 있었다. 두 사람이 각자 하나씩 꺼냈다.
계산대로 갔다. 점원이 스캔했다. 금액이 떴다.
"내가 살게."
김하늘이 카드를 먼저 댔다.
"왜요."
"어제 수빈이 보낸 것 때문에 불편했으면 미안하니까."
"불편하진 않았어요."
"그래도."
영수증을 받으면서 윤시하한테 건넸다. 창가 자리로 가서 앉았다. 윤시하가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 편의점 안이 어제와 달랐다. 강수현이 없었다. 강수현이 없는 달빛 편의점이 처음이었다. 냉장고 소리는 같고, 점원도 같고, 창밖 언덕도 같은데, 뭔가 달랐다. 공기 중에 뭔가가 없는 것 같은 느낌. 그게 뭔지 생각하다가 생각을 멈췄다.
"강수현이 여기서 알바한다는 거 알아?"
김하늘이 뚜껑을 열면서 물었다.
"어제 알았어요."
"그렇구나." 김하늘이 음료를 마셨다. "나는 저번 달에 알았어."
"알고 어떻게 했어요."
"그냥. 알게 된 거야."
"들어온 적 있어요? 강수현이 있을 때."
"아니." 김하늘이 창밖을 봤다. "들어오려다가 못 들어온 적은 있어."
"왜요."
"들어가면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뭘요."
"모르겠어. 그냥 그런 느낌." 김하늘이 음료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강수현이랑 나는 말이 없거든. 학교에서도. 엄청 나쁜 사이는 아닌데, 그렇다고 편한 사이도 아닌 거야. 서로 영역이 다르고 스타일이 달라서."
"어떻게 달라요."
"걔는 관심 없는 게 많고, 나는 관심 있는 게 많아." 김하늘이 창밖을 봤다가 다시 윤시하를 봤다. "그게 학교에서는 그냥 평행선이었는데, 요즘은."
"요즘은."
"같은 점이 하나 생긴 것 같아서."
말이 거기서 끊겼다. 김하늘이 음료를 마셨다. 윤시하가 봤다.
"그게 나예요?"
"그렇게 들렸어?"
"그렇게 들렸어요."
김하늘이 잠깐 윤시하를 봤다. 그 눈이 뭔가를 계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진짜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경계가 지금은 이전보다 좀 더 불분명했다.
"맞아."
한 마디였다. 짧고 선명하게.
점원이 카운터에서 잡지를 꺼냈다. 적당히 넘기다가 멈췄다. 두 사람을 보지 않았다.
김하늘이 다시 말했다.
"너는 어때."
"뭐가요."
"우리 중에서. 강수현이랑 나랑."
윤시하가 음료 뚜껑을 돌리면서 생각했다.
이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어떻게 대답해도 뭔가를 선택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었다. 그게 지금 의도된 질문이라는 걸 윤시하는 알고 있었다.
"비교하기 어려워요."
"왜."
"두 사람이 나한테 하는 방식이 달라서요. 비교가 되려면 같은 선에 있어야 하는데."
김하늘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 말은 어떤 의미야."
"그냥 말 그대로예요."
"강수현이 먼저 뭔가 했다는 말이야?"
"먼저라는 기준도 모르겠어요."
김하늘이 잠깐 창밖을 봤다.
편의점 문이 열렸다.
들어오는 사람을 봤다.
강수현이었다.
교복 그대로였다. 오늘 수요일, 학교 끝나고 바로 오는 날. 예상보다 빨리 왔다. 가방을 메고 들어오다가 창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봤다.
윤시하를 봤다. 김하늘을 봤다.
멈추지 않았다.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면서 점원한테 말했다.
"왔어요."
"그래. 오늘 일찍 왔네."
"학원 빨리 끝났어요."
강수현이 가방을 카운터 옆에 내려놓으면서 편의점 조끼를 걸쳤다. 그 과정에서 창가 쪽을 한 번 봤다가 보지 않았다.
김하늘이 윤시하 쪽으로 시선을 보내면서 작게 말했다.
"오늘 타이밍 이상하다."
"그러게요."
"일부러 온 거 아니지?"
"일부러 온 거 아니에요."
"나도 일부러 온 게 아닌데." 김하늘이 잠깐 생각하더니 음료를 들었다. "뭔가 자꾸 겹치네, 우리 셋이."
강수현이 카운터 안으로 들어가면서 영수증 통을 확인했다. 뭔가 일을 시작하려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있는 쪽을 다시 봤다.
눈이 마주쳤다. 윤시하와.
0.5초였다.
강수현이 먼저 시선을 내렸다.
김하늘이 그 장면을 봤다. 음료를 마시면서,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처럼.
잠깐 편의점이 조용해졌다.
냉장고 소리. 창밖 언덕에서 오는 바람 소리. 카운터 안쪽에서 강수현이 뭔가를 정리하는 소리.
김하늘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나 먼저 갈게. 학원 있어서."
"응."
"내일 봐."
"응."
김하늘이 음료를 들고 걸어가면서 카운터 쪽을 봤다. 강수현과 눈이 마주쳤다.
"수고해."
강수현이 잠깐 봤다.
"응."
처음으로 두 사람이 주고받은 말이었다. 짧았다. 학교에서는 거의 없던 일이었다.
김하늘이 편의점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편의점 안에 윤시하와 강수현만 남았다.
강수현이 카운터 안에서 영수증 롤을 교체하다가 말했다.
"오늘 도 왔네."
"어제랑 오늘이 연속이라 좀 그렇긴 해."
"뭐가."
"노골적인 것 같아서."
강수현이 영수증 롤을 끼우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뭔가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침묵인 것 같기도 했다.
"하늘이가 뭐라고 했어."
"여러 가지요."
"그중에."
"먼저 물어보는 사람이 진다고."
강수현이 롤 교체를 끝내고 카운터 위를 닦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먼저 말하게 됐어요."
"하늘이한테."
"응."
강수현이 행주를 내려놨다. 윤시하를 봤다.
"무슨 말."
"둘이 비교하기 어렵다고. 같은 선에 있어야 비교가 되는데 방식이 달라서."
강수현이 한 박자 있다가 창밖을 봤다. 김하늘이 이미 사라진 언덕. 아무것도 없는 창밖을 보다가 말했다.
"그게 지는 거야, 이기는 거야."
"모르겠어요."
점원이 잡지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 쪽으로 들어갔다.
강수현이 다시 윤시하를 봤다.
"어제 물어보려다가 못 한 거."
"타이밍이."
"응." 강수현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타이밍이 꼬인다는 게 뭔지 물어보려고 했지."
"알아."
"물어봐."
윤시하가 강수현을 봤다.
강수현이 카운터에 기대면서 말했다. 아까보다 조금 열린 자세였다.
"어떤 타이밍이야?"
강수현이 잠깐 생각했다.
"말이 나오려는 순간마다 뭔가 생겨. 사람이 들어오거나, 소리가 나거나,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이거나." 시선이 카운터 위 어딘가에 닿았다. "너 앞에서만 그래."
"왜 그런 것 같아."
"모르겠어."
짧게 말하고 카운터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더 말하지 않았다.
윤시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음료 뚜껑을 돌렸다.
너 앞에서만 그래.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물어볼 타이밍이 왔다.
"그게."
강수현이 봤다.
"나한테도 가끔 그런 것 같아."
강수현의 눈이 한 박자 멈췄다. 움직임이 없었다.
편의점 문이 열렸다.
이번엔 배달 기사였다. 냉동식품 박스를 들고 들어왔다. 점원이 창고에서 나오면서 받았다.
강수현이 그쪽으로 가서 확인 서명을 했다.
그 동안 윤시하는 음료를 마셨다. 창밖을 봤다. 언덕 위로 저녁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배달 기사가 나갔다. 문이 닫혔다. 강수현이 카운터로 돌아왔다.
이번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화가 거기서 멈춘 것처럼 됐다.
윤시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게."
강수현이 봤다.
이번엔 수고해, 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 봤다.
1초.
문 쪽으로 걷다가 잠깐 멈췄다.
"내일 봐."
강수현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오기 전에 나왔다.
편의점 문이 닫혔다. 저녁 공기가 들어왔다. 언덕 위에서 바람이 내려왔다. 편의점 간판 불빛이 등 뒤에 있었다.
걸어가면서 방금 한 말이 돌아왔다.
나한테도 가끔 그런 것 같아.
어떻게 들렸을지는 몰랐다. 배달 기사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뭔가 달라졌을지도.
어느 쪽인지는 몰랐다.
먼저 물어보는 사람이 진다고 했다. 근데 아까 누가 먼저였는지는 이미 의미 없는 것 같았다.
언덕 중간쯤에서 멈춰서 뒤를 돌아봤다.
달빛 편의점 창문이 보였다. 불이 켜져 있었다. 카운터 안에 강수현이 있을 것이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지는 않았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떻게 들렸으면 하는지도 아직 잘 몰랐다.
다만 말이 나왔다. 그냥, 나왔다.
언덕을 다 내려가면서 달빛 편의점 불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연서동 수요일 저녁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