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타이밍이 자꾸 꼬이지
3월 24일 화요일, 저녁 6시 53분.
달빛 편의점 안이 조용했다.
냉장고가 윙윙거렸다. 천장 조명 하나가 미세하게 깜빡였다. 카운터 뒤 선반에 껌이랑 캔디 봉지들이 줄 맞춰 있었다. 점원은 없었다. 창고에 들어간 것 같았다. 저녁 7시 직전이라 학원 마친 학생들도 이미 지나가고, 퇴근 인파는 아직 내려오기 전이었다. 가게가 조용해지는 그 사이의 시간.
강수현이 계산대 뒤에 혼자 서 있었다.
교복이 아니었다. 편의점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채로 계산대 앞 바코드 스캐너를 마른 행주로 닦고 있었다. 학교에서 보던 것과 같은 사람인데 달라 보였다. 교복 없이 조끼를 입으면 달라 보이는 건지, 아니면 여기서는 표정 자체가 다른 건지. 어깨에서 힘이 빠져 있었다. 아주 조금.
편의점 문이 열렸다.
강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윤시하였다.
학교에서 보던 가방 없이 왔다. 손에 핸드폰만 들고 있었다. 편의점 안을 한 번 훑다가 카운터 뒤 강수현을 봤다. 강수현이 윤시하를 봤다.
"여기서 일해?"
"응."
윤시하가 들어오면서 음료 코너로 걸어갔다. 냉장고 앞에 서서 들여다봤다. 뭘 살지 정하지 않은 것 같았다. 냉장고가 열리고 닫혔다.
"몇 시까지야."
"아홉 시 반."
"많이 남았네."
"응."
강수현은 다시 스캐너를 닦았다. 윤시하가 음료 하나를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다른 걸 꺼냈다가 또 넣었다.
"라면 있어?"
"컵라면 코너 저기."
"신라면이야 육개장이야."
"둘 다."
윤시하가 컵라면 코너로 가서 신라면을 하나 집었다. 그리고 냉장고로 돌아와서 음료를 골랐다. 에너지 드링크가 아닌 보리차였다.
계산대 앞에 섰다. 강수현이 바코드를 찍었다. 삑 소리가 났다. 한 번 더. 금액이 화면에 떴다.
"뜨거운 물."
강수현이 카운터 옆 온수기를 턱으로 가리켰다. 윤시하가 거기서 물을 부었다. 컵라면 뚜껑을 닫고 창가 자리로 갔다.
강수현은 카운터로 돌아갔다.
편의점이 다시 조용해졌다. 냉장고 소리. 컵라면 익어가는 냄새. 3월 저녁의 창문 바깥. 카운터 안쪽에서 영수증 종이가 풀리는 소리가 짧게 났다가 멈췄다.
윤시하가 뚜껑을 누르면서 창밖을 봤다. 언덕에 사람이 없었다. 저녁이 되면서 가게 불빛들이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학원가 쪽에서 불빛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편의점 유리창에 간판 글자가 희미하게 반사됐다.
"여기 오래 됐어?"
강수현이 카운터 안에서 영수증 롤을 확인하면서 대답했다.
"두 달."
"학교 끝나고 바로 와?"
"화목은 학원이 먼저야. 저녁에 와. 월수금은 끝나고 바로."
"오늘 화요일이니까."
"응."
짧은 대화였다. 강수현이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윤시하도 더 묻지 않았다. 잠깐 조용해졌다. 어색한 건 아니었다. 정확히는, 어색한데 이상하게 괜찮은 종류의 침묵.
"배고파?"
"점심을 좀 일찍 먹었어."
"급식이 별로였어?"
"아니, 오후에 뭔가 많았거든. 빨리 끝내고 싶었어."
"뭐가."
윤시하가 라면 뚜껑을 열었다. 국물 냄새가 올라왔다.
오늘 오후. 세 번째 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이수빈이 복도에서 윤시하한테 말을 걸었다. "반에서 아직 모르는 애들 있으면 좀 소개해줄게. 전학생이면 어색할 것 같아서."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좋은 의도처럼 들렸다. 그런데 2주 반 동안 직접 말을 건 적이 없던 애였다. 박지훈이 먼저 다가가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했던 애.
"이수빈이 나한테 말을 걸었어."
강수현이 잠깐 멈췄다.
"뭐라고."
"반 애들 좀 소개해주겠다고. 전학생이니까 모르는 사람 많지 않냐고."
강수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수증 롤을 손에서 내려놓으면서 카운터 위를 봤다. 어딘가를 보는 게 아니라 생각하면서 시선이 거기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해?"
"걔가 먼저 움직이는 게 이상하긴 하지." 강수현이 말했다. "누가 들어와도 기다리는 편이거든. 먼저 말 거는 스타일이 아니야."
"그럼 뭔가 이유가 있겠네."
"하늘이가 시킨 건지. 자기가 궁금해서 들어온 건지."
"어느 쪽이 더 가능성 있어?"
"반반." 강수현이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했다가 말했다. "둘 다일 수도 있어. 하늘이가 시켰는데 자기도 궁금한 거."
"복잡하네."
"별로." 강수현이 카운터 옆에 기댔다. "하늘이가 직접 안 움직이고 수빈이를 보냈다는 게 더 눈에 들어와. 왜 직접 안 왔을까."
윤시하가 라면을 먹으면서 그 말을 생각했다.
그 말은 맞았다. 김하늘이 직접 물어볼 수도 있었다. 옆자리니까. 점심 때 같이 밥을 먹기도 하니까. 그런데 직접 안 하고 이수빈을 통했다는 건.
"정보를 모으면서 자기가 나서지 않으려는 거 아닐까."
강수현이 윤시하를 봤다.
"그걸 지금 알았어?"
"알고 있었는데 소리로 하니까 달라서."
강수현이 작게 코웃음 같은 걸 쳤다. 웃은 게 맞는지 모르겠는 소리였다. 입꼬리가 아주 잠깐 움직인 것 같기도 했다. 금방 다시 무표정이 됐다.
창밖에서 배달 오토바이 소리가 지나갔다. 편의점 간판 불빛이 창문 유리에 반사됐다. 달빛 편의점 글자가 뒤집혀 보였다.
"김하늘이 왜 그러는 것 같아?"
강수현이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했다.
"자기가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직접 나서면 손해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카운터 위 영수증 통을 손가락 끝으로 건드렸다. 천천히 돌았다가 멈췄다. "하늘이가 전면에 나오는 건 자기가 확신이 생겼을 때야."
"그 말은."
"아직 확신이 없다는 거지."
윤시하는 국물을 한 숟가락 마셨다. 뜨거웠다. 편의점 라면의 그 짭짤한 맛이었다.
"수현이는."
윤시하가 말했다.
"뭐."
"학교에서 이런 거 신경 쓰여?"
강수현이 대답하지 않았다. 카운터 위를 보면서 영수증 통을 손가락 끝으로 건드렸다. 천천히 돌았다가 멈췄다. 돌아가는 걸 보다가 멈추는 걸 봤다.
"너 일이잖아."
"나한테 일어나는 일이 수현이한테 영향 없어?"
"없어."
"진짜로?"
강수현이 이번엔 윤시하를 봤다. 시선이 직선이었다. 피하지 않는 눈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신경 쓰이는 게 없어. 원래부터."
"그건 알아."
"그럼."
"그래도." 윤시하가 국물을 마시면서 말했다. "궁금해서."
강수현이 잠깐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대답이 없었다. 대답하기 싫은 건지 생각 중인 건지 알 수 없었다.
편의점 바깥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가 멀어졌다. 냉장고가 잠깐 모터 소리를 더 내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수빈이가 뭐라고 했어, 구체적으로."
강수현이 먼저 말을 돌렸다.
"소개해줄 애들 목록을 말해줬어. 누구는 어떤 성격이고, 누구는 어떤 취미 있고."
"그게 전부야?"
"마지막에 하나 더 물어봤어. 달빛 편의점 자주 가냐고."
강수현이 잠깐 멈췄다.
"그 말 했어?"
"응."
"그러면." 강수현이 카운터 위를 보다가 다시 윤시하를 봤다. "수빈이가 여기서 너 봤거나, 아니면 누군가한테 들은 거야. 너랑 내가 여기 있었다는 거."
윤시하가 그 말을 생각했다.
맞았다. 이수빈이 달빛 편의점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는 건 알고 있다는 거였다. 삼각김밥 날에 창밖에서 봤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전달했거나.
"그 날 창밖으로 지나갔잖아. 이수빈이."
"아, 맞아."
"다 봤겠지."
윤시하는 라면을 다 먹고 컵라면 용기를 내려놨다. 보리차를 마셨다. 편의점이 다시 냉장고 소리로 채워졌다.
"우산."
강수현이 먼저 말했다.
"응?"
"그거. 아직 갖고 있어?"
"응. 돌려줘야 하는데 기회가 없었어."
"됐어."
"빌린 건데."
"준 거야." 짧게. "가져."
더 말하지 않았다. 뒤를 돌아서 카운터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돌아줘도 안 받겠다는 게 말투에서 분명했다.
윤시하가 그 뒷모습을 잠깐 보다가 말했다.
"알겠어. 고마워."
강수현이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잠깐이었다.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뭐가 멈춘 건지는 몰랐다.
"왜 여기 왔어."
들리지 않을 것 같이 작은 소리였는데 들렸다.
"지나가다가."
"우리 집 방향 아닌데."
윤시하가 잠깐 생각했다.
"좀 돌아서 왔어."
강수현이 몸을 돌렸다. 윤시하를 봤다. 표정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표정이 아닌, 뭔가를 소화하는 중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물어볼 것 같았다가 안 물어봤다.
창고 문이 열렸다.
점원이 박스를 들고 나왔다. 두 사람을 봤다. 카운터 뒤 강수현, 창가 자리 윤시하. 잠깐 봤다가 박스를 내려놓고 선반 정리를 시작했다.
강수현이 카운터 끝으로 이동하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윤시하한테 한 건지 혼잣말인지 경계가 불분명했다. 들릴 것 같지 않은 소리였는데 들렸다.
"너 앞에선... 왜 자꾸 타이밍이 꼬이지."
윤시하가 봤다.
강수현은 이미 카운터 안에서 다른 걸 정리하고 있었다. 그쪽을 보지 않았다. 방금 한 말을 거둬들이거나 설명하려는 것 같지 않았다. 그냥 나온 말이고, 그게 전부인 것처럼.
타이밍이 꼬인다는 게 뭔지 물어보려는 순간에 편의점 문이 열렸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 둘이 들어와서 과자 코너로 달려갔다. 한 명이 뭔가를 크게 말하면서 웃었다. 편의점 안의 조용함이 한꺼번에 깨졌다.
강수현이 그쪽을 봤다.
윤시하는 물어볼 타이밍을 잃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쓰레기를 버렸다. 카운터 앞에 서서 강수현을 봤다.
"가게."
강수현이 봤다.
"수고해."
강수현이 대답하지 않았다. 중학생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윤시하가 문 쪽으로 걷다가 잠깐 돌아봤다. 강수현은 중학생들이 고른 과자를 스캔하고 있었다. 이쪽을 보지 않았다.
점원이 선반 정리를 하다가 툭 말했다.
"많이 오네, 요즘."
누구한테 한 말인지 몰랐다.
윤시하가 편의점을 나왔다.
3월 말 저녁 공기가 들어왔다. 낮보다 선선하고 밤보다 아직 따뜻했다. 언덕 위로 바람이 불었다. 편의점 간판 불빛이 등 뒤에 있었다.
걷기 시작했다. 언덕을 내려가면서 방금 들은 말이 돌아왔다.
너 앞에선 왜 자꾸 타이밍이 꼬이지.
타이밍이 꼬인다는 게 뭔지. 어떤 타이밍인지. 복도에서 말을 정리한 것인지, 삼각김밥 건인지, 우산 건인지. 아니면 그 전체인지. 말이 나오려는 순간에 항상 뭔가가 끼어든다는 뜻인지.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 순간에 문이 열리지만 않았어도.
언덕 중간에서 걸음이 한 박자 느려졌다가 다시 빨라졌다.
타이밍 얘기를 하면서 타이밍을 놓쳤다는 게 웃겼다. 나쁜 의미로 웃긴 게 아니라 그냥 웃겼다. 강수현이 그 말을 한 것도, 윤시하가 물어볼 타이밍에 문이 열린 것도.
언덕 아래 골목에서 치즈 냄새가 올라왔다. 저 아래 연서동 골목에 저녁 불빛이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걸어가면서 달빛 편의점 간판 불이 점점 멀어졌다.
내일은 수요일이었다. 강수현이 학교 끝나고 바로 오는 날.
그게 왜 생각이 나는지는 모르는 채로 계속 걸었다.
연서동이 저녁으로 바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