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지분 15%, 그리고 결혼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백설희는 울지 않았다. 대신 주가를 눌렀다.
미래리테일 마이너스 4.7퍼센트. 속보가 뜬 지 8분 만의 낙폭이었다. 화면 위를 스치는 손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떨릴 이유가 없었다. 감정은 나중에 처리하면 된다.
종로 미래센터 34층 이사회실. 긴급 소집된 이사 열두 명 중 아홉 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머지 셋은 복도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누구에게 전화하는지가 중요했다.
병원에 전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사회실의 테이블 위에는 2분기 실적 보고서가 펼쳐져 있었다. 아무도 집어 가지 않았다. 30분 전까지 이 방의 주인이었던 사람이 의식불명이라는 단어 하나로, 서류들은 김이 빠진 전쟁의 전투 계획처럼 방치되었다.
설희는 창 너머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보지 않았다. 이사들의 시선을 세고 있었다.
적대 넷. 중립 다섯. 아군 셋.
숫자가 맞지 않았다. 어제까지 중립이었던 김 상무의 시선이 달라져 있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방식으로. 하룻밤 사이에 사람이 움직인 것이다. 그게 이 판의 속도였다.
복도 끝에서 백승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부드러운. 사람을 안심시키는 종류의 목소리. 오빠는 늘 그런 목소리를 썼다. 아버지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도, 어머니 장례식장에서도. 슬픔과 안도를 동시에 파는 목소리. 그래서 더 위험한.
설희는 승현의 통화 방향을 봤다. 입모양이 보였다. '네, 그쪽으로 진행해주시죠'—그런 종류의 입모양이었다. 병문안 상대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거래 상대에게 하는 말이었다.
설희는 시계 줄을 만졌다. 차가운 금속이 맥박을 눌렀다.
승현이 돌아왔다.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는 손이 여유로웠다. 병원 연락을 받은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설희야."
승현이 다가왔다. 부드러운 미소. 포옹할 듯한 거리.
"아버지는 일단 안정적이시래. 걱정 마."
걱정하지 않는다. 네가 누구에게 전화했는지가 더 걱정이다.
그 말은 삼켰다.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백가의 딸은 이사회실에서 감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이 아버지가 가르친 유일하게 쓸모 있는 것이었다.
───
장미라 비서가 태블릿을 가져왔다. 화면에는 이사회 일정표가 떠 있었다.
"이사님, 확인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설희가 화면을 받았다. 내일 긴급 이사회 안건 목록. 거기에 설희의 이름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설희가 주도해야 할 '전략적 제휴 안건'이 승현의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8분. 아버지가 쓰러지고 겨우 8분 만에 안건 명의가 변경되었다.
효율적인 반란이었다. 감탄할 정도로.
설희는 화면을 내려놓았다. 소리 나지 않게.
"회장님 병실 출입 기록도 확인했습니다."
장미라가 목소리를 낮췄다.
"백승현 부사장님이 먼저 도착하셨고, 의료진과 30분간 단독 면담을 하셨습니다. 이후 주치의 연락처가 변경됐습니다."
주치의 변경. 병상 통제. 이사회 안건 명의 변경.
설희는 창밖을 봤다. 서울의 불빛이 흐릿했다. 아니, 흐릿한 건 서울이 아니었다.
너는 백가의 얼굴이지, 주인이 아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스물세 살 크리스마스에 들은 말. 와인잔 너머로 아버지는 웃고 있었고, 그 웃음이 칼날보다 정확하게 가슴을 갈랐다. 설희는 그날 밤 자기 방에서 아무것도 부수지 않았다. 대신 다음 해 연도별 경영 계획서를 처음부터 다시 썼다. 완벽하면 달라질 거라고. 그랬다. 달라지지 않았지만, 설희는 더 완벽해졌다.
맞다. 나는 주인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설희는 태블릿을 장미라에게 돌려줬다.
"미라 씨."
"네."
"아르테미스 홀딩스 강서윤 대표. 오늘 일정 확인해주세요."
장미라의 손이 잠깐 멈췄다. 하지만 비서는 질문하지 않았다. 좋은 비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확인하겠습니다."
───
차 안은 조용했다.
설희는 파일 하나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강서윤. 33세. 아르테미스 홀딩스 CEO. 지방 출신. 전액 장학금. 서른에 물류 AI 알고리즘으로 업계 판도를 뒤집은 여자. 사진 속의 얼굴은 날카로웠다.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먼 얼굴.
이력서가 아니라 전장 보고서 같았다.
3년 전 유통 대기업 승진 누락 사건. 유리천장이라는 단어가 기사 제목에 박혀 있었다. 그 뒤로 강서윤은 직접 회사를 세웠고, 3년 만에 아르테미스를 업계 다크호스로 만들었다.
설희가 필요한 건 이 여자의 기술력이 아니었다. 물류 AI는 구실이다. 필요한 건 백기사였다. 승현과 크로노스의 공세를 막아줄 방패. 그리고 그 방패의 대가로 내밀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지분 15퍼센트. 그리고 결혼.
자신이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가장 비싼 카드였다. 백가의 이름, 백가의 얼굴, 백가의 딸. 그것만이 설희가 가진 것의 전부였다. 아버지가 준 것이 아니라 빼앗은 것이었지만, 어쨌든 가치는 있었다.
미친 생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판이었다.
설희는 파일을 덮었다. 차가 강남으로 접어들었다.
창밖으로 서울의 불빛이 흐르고 있었다. 설희는 그 불빛들을 보며 고등학교 때를 떠올렸다. 성북동 본택 서재에서 아버지가 승현에게 경영 수업을 할 때, 설희는 복도에서 같은 책을 읽고 있었다. 들어오라는 말은 없었다. 한 번도.
그럼에도 설희는 완벽해졌다. 서울대 경영학과 수석. 하버드 MBA. 28세에 미래리테일 최연소 사내이사. 모든 숫자가 완벽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한 번도 '너에게 맡기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완벽하면 사랑받을 수 있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완벽했다. 그런데 사랑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전략을 바꿔야 한다. 사랑 대신 계약을.
───
서윤은 커피를 내려놓았다. 세 번째 잔.
아르테미스 홀딩스 본사 52층. 통유리 오피스 너머로 서울이 발밑에 펼쳐져 있었다. 서윤이 직접 고른 자리였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지방 출신의 전액 장학생이 올라오는 데는 단 하나의 방법밖에 없었다. 남들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것.
모니터에는 미래리테일의 주가 차트가 떠 있었다. 마이너스 4.7퍼센트. 백종운 회장이 쓰러졌다는 속보 이후 직선 하락. 서윤은 차트의 기울기를 읽었다.
공포 매도가 아니었다. 계획된 매도의 패턴.
누군가 미리 알고 있었다.
데스크 위 전화가 울렸다.
"대표님, 미래리테일 백설희 이사님이 면담을 요청하셨습니다."
서윤의 손이 커피잔 위에서 멈췄다. 3초. 결단 전의 습관적인 침묵.
백설희. 유통 재벌 백가의 장녀. 업계에서는 '얼음 공주'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서윤은 그 별명이 싫었다. 여자 경영인에게 붙는 수식어는 늘 외모 아니면 온도였다. 능력이 아니라.
"들어오시라고 해."
문이 열렸다.
백설희가 들어왔다. 로로피아나 코트. 흑단처럼 곧게 떨어지는 장발. 그리고 서윤이 예상했던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표정.
슬픔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병원에 있는 여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계산이 끝난 눈이었다.
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시죠."
설희가 앉았다. 코트를 벗지 않았다. 오래 있을 생각이 없다는 뜻이거나, 즉시 결론을 내겠다는 뜻이었다.
서윤은 후자에 걸었다.
───
의자에 앉자 강서윤의 냄새가 스쳤다. 진하고 쓴. 블랙커피를 세 잔 이상 마신 사람의 냄새.
이 여자도 오늘 잠을 못 잤구나.
그 생각을 지웠다. 감정이입은 협상의 적이다.
설희는 가방에서 파일을 꺼냈다. 한 부. 계약서가 아니라 제안서. 숫자가 먼저 보이도록 배치한 문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서윤이 팔짱을 풀지 않은 채 시선을 줬다. 허락이 아니라 평가의 시선이었다.
"미래리테일 지주사 지분 15퍼센트. 이사회 의석 하나. 그리고 물류 AI 사업부의 독점 파트너십."
서윤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좋은 징조였다. 놀라지 않는다는 건 이미 가능성을 계산해봤다는 뜻이니까.
"대가가 뭐죠."
서윤이 물었다. 목소리에 감정이 없었다.
설희는 1초 멈췄다. 시계 줄 위에 올린 손가락이 맥박을 감지했다. 평소보다 빨랐다.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이 다음 문장이 모든 것을 바꿀 거라는 걸.
"결혼입니다."
공기가 변했다. 물리적으로. 에어컨 소리가 갑자기 또렷해졌고, 52층 유리창 너머의 서울이 한 톤 어두워졌다.
서윤이 팔짱을 풀었다. 천천히. 그 동작 하나로 대화의 온도가 5도 내려갔다.
"결혼."
반복했다. 확인이 아니라 해부하듯.
"네."
"저와요?"
"네."
서윤이 2초간 설희를 봤다. 시선이 얼굴에서 시작해 손으로 내려갔다. 시계 줄을 만지는 손. 서윤은 거기서 시선을 멈췄다.
그리고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아. 봤구나.
설희는 손을 내렸다. 이미 늦었다. 이 여자는 손을 읽었다.
"미래리테일 사내이사이자 백가 장녀인 백설희 씨가, 아르테미스 홀딩스 대표인 저에게, 아버지가 쓰러진 날 결혼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서윤이 사실을 나열했다. 냉정하게. 하지만 그 나열 자체가 질문이었다. '왜요'가 아니라 '얼마나 급합니까'라는.
"그렇습니다."
설희는 턱을 미세하게 들었다. 아버지에게 보고할 때의 자세. 무의식이었다.
"이건 합병입니다. 두 회사의 전략적 결합이고, 결혼은 그 결합을 법적으로 묶는 형식입니다."
"형식이라."
서윤이 그 단어를 혀에 올렸다가 뱉었다. 마치 와인의 품질을 확인하듯.
서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걸어갔다. 서울이 발 아래 깔려 있었다. 서윤은 그 풍경을 배경으로 돌아섰다. 역광을 받아 얼굴이 반쯤 읽혀졌다. 계산된 동작이었다. 이 여자도 협상을 알고 있었다.
"백설희 씨."
"네."
"아버지가 쓰러진 날, 병원이 아니라 저를 찾아온 이유가 뭐죠. 진짜 이유요."
설희의 심장이 한 박자 빨라졌다. 거짓말을 하면 될 일이었다. 전략적 시너지, 시장 지배력, 주주 가치 극대화. 이사회에서 쓰는 단어들로 포장하면 됐다.
하지만 강서윤의 눈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오빠가 저를 밀어내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목소리가 갈라졌다. 미세하게. 손바닥의 땀이 차가워졌다. 0.5초 만에 복구했지만, 서윤은 들었을 것이다. 이 여자는 0.5초를 듣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부터 준비된 일입니다. 크로노스 캐피털과 접촉한 흔적이 있고, 이사회 안건이 이미 변경됐습니다. 제가 병원에 있으면 끝납니다. 오늘 밤 안에 움직이지 않으면 내일 이사회에서 저는 없는 사람이 됩니다."
서윤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5초. 10초.
그리고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간 게 아니었다. 눈이 달라졌다. 차가운 흥미가 아니라, 무언가를 인정한 사람의 눈.
"지분 15퍼센트와 결혼. 그리고 당신이 제게 줄 수 없는 한 가지."
"뭐죠."
"신뢰요. 아직은."
서윤이 다시 앉았다. 등을 기대지 않았다. 팔짱도 끼지 않았다. 열린 자세. 협상의 언어로는 '조건부 수락 가능'이었다.
"일주일 드리겠습니다. 계약서를 보내주세요. 변호사가 검토할 겁니다."
서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낮아진 만큼 단단해졌다.
"하지만 한 가지."
"말씀하세요."
"이건 사업입니다. 당신이 감정을 섞는 순간, 저는 나갑니다."
설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코트 매무새를 정리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지금은.
문 앞에서 멈췄다.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말했다.
"이건 프러포즈가 아닙니다."
잠깐 숨을 쉬었다.
"인수 제안이에요, 강서윤 대표."
문이 닫혔다.
───
서윤은 닫힌 문을 봤다.
커피가 식어 있었다. 네 번째 잔을 따를 생각은 없었다.
창밖의 서울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서윤은 백설희가 앉았던 의자를 봤다. 쿠션에 주름 하나 없었다. 등을 기댄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의자 하나로도 사람은 읽히는 법이었다.
3년 전이 떠올랐다. 승진 누락을 통보받던 날. 그날의 회의실. 상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다. '팀 내 조화'라는 말이 나왔다. 서윤은 그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 그날 서윤도 그 회의실에서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눌렀었다. 기대면 무너지니까. 그리고 그날 밤 퇴직서를 썼다.
백설희의 손이 시계 줄을 누르던 것과 같은 동작이었다.
그래서 알아본 것이다.
모니터를 켰다. 미래리테일 주가는 여전히 하락 중이었다. 하지만 서윤이 보는 건 주가가 아니었다.
서윤은 전화기를 들었다.
"법무팀 연결해. 합병 계약서 검토 준비하라고."
전화를 끊고 커피를 마셨다. 식은 커피는 쓴맛이 더 선명했다. 혀 끝에 남은 그 쓴맛을 음미하며 서윤은 창밖을 봤다. 서울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결혼이라.
입꼬리를 올렸다.
이 도박의 배당률은 아직 계산이 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