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인수 제안
저는 사랑을 팔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분은 삽니다.
백설희가 나간 뒤, 그 말이 서윤의 머릿속에서 3초 동안 맴돌았다.
사무실 안은 조용했다. 비서가 차를 가져왔다가 내려놓고 나갔다. 서윤은 그 차에 손을 뻗지 않았다. 창밖의 서울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저 멀리 종로 방향—미래센터 34층에 불이 켜져 있을 것이다. 지금쯤 백설희는 차 안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흔들리지 않는 척 창밖을 보고 있을 것이다.
서윤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법무팀 연결은 했다. 계약서 검토 준비도 지시했다. 그런데 손이 멈췄다.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채로.
왜 멈추는 거야.
합리적인 판단의 순서를 밟으면 된다. 지분 15퍼센트. 이사회 의석 하나. 물류 AI 독점 파트너십. 숫자로 계산하면 된다. 서윤은 그렇게 해왔다. 33년 내내. 감정을 숫자로 환산하고, 숫자가 맞으면 움직이고, 맞지 않으면 버리고.
그런데 백설희의 손이 자꾸 보였다.
시계 줄을 누르던 손. 떨리지 않으려고 맥박을 누르던.
3년 전이 겹쳤다. 서윤도 그랬으니까. 승진 누락 통보를 받던 그 회의실. 서윤은 무릎이 아니라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고 눌렀었다. 떨린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그리고 아무것도 부수지 않고 나왔다. 나와서 퇴직서를 썼다.
같은 손이었다. 다른 전쟁을 치르는.
그래서 알아본 것이다. 저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 상황에 있는지를.
모니터에 미래리테일 주가 차트를 다시 띄웠다. 마이너스 4.7퍼센트에서 장이 마감됐다. 내일 개장이 변수였다. 크로노스 캐피털이 공개매수를 선언하기 전에 설희가 우호 지분을 확보하지 못하면—
계산. 계산만 해.
아르테미스가 지금 필요한 것: 올드머니 가문의 네트워크. 백설희가 가진 건 이름이었다. 70년 미래그룹. 돈으로 살 수 없는 문의 코드.
설희가 필요한 것: 자금과 기술과 방패. 크로노스를 막을 우호 지분.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서윤은 전화기를 들었다.
"오 팀장, 미래리테일 재무 구조 분석 내일 아침까지. 크로노스 공개매수 시나리오 시뮬레이션도 같이."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멈췄다. 또.
계약서에 넣지 않은 조항이 하나 있었다. 백설희가 꺼낸 적 없는 조항. 그런데 서윤의 머릿속에서 자꾸 튀어나오는 단어.
동거.
계약 결혼의 진정성을 보여주려면 같은 주소지가 있어야 한다. 파파라치와 이사회 모두 그것을 확인한다. 두 사람이 '진짜처럼' 보여야 방어막이 유효하다.
그런데 왜 설희는 그 조항을 넣지 않았을까.
서윤은 냉커피를 마셨다. 씁쓸한 맛이 혀 끝에 퍼졌다.
───
다음 날 오전 열 시.
설희는 아르테미스 로비에 들어섰다.
어젯밤은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얼굴에 드러나서는 안 된다. 설희는 거울 앞에서 30분을 썼다. 다크서클 위에 컨실러. 입술에 딱 두 번. 그리고 로로피아나 재킷. 어머니가 생전에 말했다. 갑옷은 옷장에서 고르는 것이라고.
"백설희 이사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어제와 다른 응접실이었다. 더 작고, 창이 없었다. 서윤이 이 방을 선택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외부에 보이지 않게. 협상을 내밀하게.
설희가 의자에 앉았다. 등을 기대지 않았다.
5분 뒤 강서윤이 들어왔다.
어제와 똑같은 자세였다. 남색 수트. 단정하게 묶은 머리. 파일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동작이 조용하고 정확했다.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의 동작.
"앉으세요."
서윤이 먼저 앉으며 말했다. 권하는 게 아니라 시작을 알리는 말투였다.
설희는 이미 앉아 있었다. 그 사실을 서윤이 알면서도 말한 것이라면, 기선 제압이었다. 좋다. 그렇게 생각하게 두자.
"계약서 초안 받으셨죠."
"받았습니다."
서윤이 파일을 열었다. 붉은 펜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열두 군데.
설희의 눈이 그 표시들을 훑었다. 어젯밤 변호사가 우려했던 조항은 다섯 개였다. 서윤은 그보다 많이 찾아냈다.
예상보다 예리하다.
"조항 3번."
서윤이 가리켰다.
"계약 기간 2년 후 자동 해소 조항. 이게 살아 있으면 크로노스는 2년 뒤를 노립니다. 방어막이 아니라 유예기간이 됩니다."
설희가 다음 말을 막기 전에 파일을 꺼냈다.
"그래서 수정안이 있습니다."
서윤의 파일 옆에 나란히 놓았다.
"자동 해소를 삭제했습니다. '상호 합의 하에 종료' 조항으로 대체했어요. 크로노스에게는 영구 방어막처럼 보입니다."
서윤이 수정안을 읽었다. 표정이 없었다. 표정이 없다는 게 표정이었다.
"리스크가 있습니다. 저한테요."
"분쟁 시 제3자 중재 조항을 같이 보세요. 조항 8번입니다. 독립 중재인이 결정하는 구조로 리스크를 분산했습니다."
서윤이 읽었다. 그리고 설희를 봤다.
시선이 달라졌다. 평가가 아니었다. 다른 무언가였다. 설희는 정의하지 않기로 했다.
"조항 11번. 공식 행사 동반 출석 의무."
서윤이 파일을 덮으며 말했다.
"여기에 조건을 추가하겠습니다."
펜을 들었다. 빈 여백에 직접 썼다.
설희는 그 글씨를 읽었다.
'연기의 범위는 두 당사자가 사전 합의한 수준을 초과하지 않는다.'
"키스 연기, 가능하십니까."
서윤이 올려다봤다. 눈이 달라지지 않았다. 완전히 비즈니스적인 눈이었다.
침묵이 왔다.
설희는 그 침묵 안에서 계산했다. 공식 석상에서의 연기. 범위. 신체 접촉의 수준. 숫자로 환산할 수 있는 것들. 그런데 서윤이 이 질문을 저 눈으로 던지는 것이— 왜 계산이 안 됐다.
3초.
"의미를 물은 겁니다."
설희가 말했다. 목소리를 유지하면서.
"공식 석상에서 허용 가능한 신체 접촉의 범위를 사전에 정하자는 뜻입니다. 분쟁 방지를 위해서요."
합리적이었다. 너무 합리적이어서 오히려 설희는 말문이 막혔다.
"동의합니다."
"그러면 한 가지 더."
서윤이 새 페이지에 펜을 들었다.
"동거 조항."
설희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멈췄다.
"계약서에는 없는 항목이군요."
"그래서 지금 넣자는 겁니다. 같은 주소지 없이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먼저 말하지 못했던 건—
왜 못했을까.
"어디서요."
"합의가 필요하겠죠."
"PH129 청담."
설희가 말했다. 일부러 빠르게.
"종로와 테헤란로 중간입니다. 이미 제 명의라 계약이 간단해요. 그리고—"
잠깐 숨을 들이쉬었다.
"한강이 보입니다. 사진에 잘 나와요."
서윤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한강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까."
"언론이 좋아합니다."
"……."
서윤이 메모를 했다. 설희는 그 메모를 읽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청담으로 하죠."
계약서 여백에 글씨가 채워졌다. 동거 조항. 주소지. 개시일.
서윤이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당신, 생각보다 위험하군요."
"무슨 의미죠."
"계약서를 내밀면서 수정본을 이미 준비해온 사람. 제가 어디서 막을지 예측하고 대안을 준비해온 사람."
서윤이 설희를 봤다. 이번엔 시선이 달랐다.
"협상에서 사랑받을 생각이 없는 사람이군요."
설희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어젯밤 자신이 혼자 되뇌던 문장. 그것을 서윤이 읽어냈다.
이 여자는 얼마나 보는 거야.
"사랑받을 필요 없습니다."
설희가 말했다.
"이기면 됩니다."
서윤이 먼저 계약서에 서명했다. 설희 쪽으로 밀었다.
설희가 펜을 들었다. 잠깐 멈췄다. 종이 위 자신의 이름 칸을 봤다.
백설희.
사인하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
응접실을 나오면서 설희는 복도에서 걸음을 멈췄다.
3초.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번엔 억누르지 않았다. 복도에 혼자였으니까.
됐다. 방패를 얻었다.
그런데 왜 아드레날린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올라오는 느낌이었을까.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건 나중에 해도 된다.
설희는 걸음을 뗐다.
그런데 계속 서윤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당신, 생각보다 위험하군요.
위험한 건 설희가 아니었다. 위험한 건 저 말을 저 눈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설희가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거울 속 자신을 봤다.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
서윤은 계약서를 바라봤다.
백설희의 사인. 흔들림 없는 글씨체.
오 팀장이 보고서를 내밀었다. 서윤이 받아서 첫 페이지를 열었다. 미래리테일 재무 분석. 크로노스 시뮬레이션.
숫자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페이지 위에서 눈이 자꾸 미끄러졌다.
한강이 보입니다. 사진에 잘 나와요.
그 말이 왜 자꾸 생각나는 거야.
서윤은 보고서를 덮었다. 창밖을 봤다. 저 멀리 청담동 방향.
이건 계약이다.
모니터에 캘린더를 열었다. 입주일을 입력했다. 그 칸에 이름을 쓰다가 멈췄다.
두 이름.
강서윤. 백설희.
처음으로 같은 칸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