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동거 조건〉
서윤의 핸드폰 화면이 기울어지는 순간, 설희의 손끝이 먼저 얼었다.
플래시가 터졌다. 카메라 두 대. 마이크 세 개. 두 사람의 얼굴을 담으면서, 그 얼굴 위로 무엇이 지나가는지는 담지 못했다.
서윤의 핸드폰이 기울어졌다. 화면 위 속보 한 줄.
크로노스캐피털·MBK 연합, 미래리테일 공개매수 선언—지분 22% 확보 목표.
설희는 그 문장을 한 번 읽었다. 두 번은 읽지 않았다.
22퍼센트. 숫자가 머릿속에서 역산을 시작했다. 현재 유통 주식 중 크로노스가 확보 가능한 물량을 뒤집으면, 최소 두 달 전부터 매집이 시작됐다는 뜻이었다.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부터.
손가락이 차가워졌다. 시계 줄 위에 올린 손이 무의식적으로 굳었다.
이건 기회를 탄 게 아니었다. 기회를 만든 거였다.
서윤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동작이 빨랐다.
"지금 나갑니다."
설희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경호에게 한 말이었다. 그러면서 설희의 팔꿈치 안쪽을 잡았다. 손이 아니라 팔꿈치. 계약서에 명시된 수준이었다. 정확히 허용 범위 안에 있다는 게 오히려 설희를 날카롭게 만들었다.
기자 하나가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공개매수 발표에 대한 입장은—"
"합병 일정은 변함 없습니다."
서윤이 먼저 말했다. 설희는 한 박자 맞췄다.
"주주 가치 훼손 시도에는 강경 대응할 것입니다."
짧았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두 문장이 마이크를 닫았다.
차 문이 닫혔다.
*
차 안은 조용했다. 도심 차량 소음이 유리를 통해 흐릿하게 들어왔다.
설희는 손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창밖을 봤다. 종로 방향이었다. 미래센터 34층 불이 켜져 있었다.
승현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속보를 봤을 것이다. 봤다면 웃었을 것이다. 부드러운 미소로.
"22퍼센트."
서윤이 먼저 말했다.
"목표가 22퍼센트라는 건, 25퍼센트를 노린다는 뜻입니다. 경영 참여 최소 지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호 지분이 얼마나 됩니까."
"이사회 찬성 기준 17퍼센트. 기관 열두 곳. 거기서 다섯 곳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서윤이 핸드폰을 꺼냈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 팀장. 크로노스 공개매수 공시 나왔어. 자금 출처, 기간, 조건 10분 안에 정리해서 올려. 22퍼센트 목표치 역산해서 LP 리스트도 같이."
전화를 끊었다. 다시 설희를 봤다.
"첫 방어선은 어디로 보십니까."
설희가 창밖에서 시선을 거뒀다. 서윤을 봤다.
"위임장입니다. 지분 싸움은 돈 싸움이에요.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건 주주 설득입니다."
"타임라인은요."
"주총 전 최소 사흘. 우호 기관 다섯 곳 중 세 곳만 잡으면 됩니다."
서윤이 잠깐 설희를 봤다. 계산이 맞는지 확인하는 눈이었다. 맞는다고 판단했는지, 다음으로 넘어갔다.
"지금부터는 질문이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답을 깔아야 합니다."
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테헤란로로 접어들었다. PH129까지 15분이었다.
*
현관 앞에 장미라가 서 있었다.
"이상 신호 확인됩니다."
짧고 낮은 목소리였다. 설희의 비서는 늘 그랬다. 말하기 전에 주변 동선을 먼저 봤다.
"카메라입니까."
"현관 기준 왼쪽 가로등 방향에 렌즈 하나 포착됐습니다. 파파라치 추정. 동선은 이미 노출된 것으로 판단합니다."
서윤이 설희 쪽으로 한 걸음 좁혔다.
"들어가죠."
현관문이 열렸다. 닫혔다.
안은 조용했다. 한강이 통유리 너머에 있었다. 야경이 낮게 깔려 있었다. 그 고요함이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았다.
설희가 코트를 걸었다. 서윤이 소파에 앉지 않고 창가에 섰다.
"공용 공간 규칙을 정해야 합니다."
설희가 말했다. 방어적으로 들리지 않으려고 조심했지만 조심한 티가 났다.
서윤이 돌아봤다.
"규칙은 종이에 쓰는 게 아니라, 지키는 사람이 만드는 겁니다."
설희는 반박하려다 멈췄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니, 맞는 말이었다. 그게 더 불편했다.
장미라가 안으로 들어왔다. 경호팀 보고서를 들고 있었다.
"대표님."
목소리가 낮아졌다.
"오늘 들어온 택배가 없는데요."
설희가 돌아봤다.
"무슨 말이죠."
"현관 보안 로그에 '패키지 수령' 이력이 있습니다. 오후 네 시 십이 분. 그런데 경호팀 기록에는 없어요."
침묵이 왔다.
서윤이 창가에서 돌아섰다.
PH129의 보안은 이중 생체인증이었다. 지문과 홍채. 경호 인력은 두 명이 교대로 현관 동선을 관리했다. 그런데 경호 기록에 없는 수령 이력이 찍혔다.
바깥에서 셔터음이 한 번 더 들렸다.
문밖 셔터음은 집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누군가 이미, 이 주소지를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