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계약 부부 연습〉
연습은 완벽했는데, 손끝만 자꾸 실전이었다.
PH129 주방. 오전 아홉 시.
장미라가 태블릿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화면에는 질문 리스트가 열려 있었다.
"시작합니다. 첫 번째. 두 분은 사랑하십니까."
설희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소리가 나지 않게.
"사랑은 증명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윤이 팔짱을 끼고 설희를 봤다.
"너무 안전합니다."
"무슨 뜻이죠."
"그 문장, 기자들이 이미 들었습니다. 어제 브리핑에서요. 같은 말을 두 번 쓰면 외운 것처럼 들립니다."
장미라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지 않고 두 사람을 봤다. 시선이 교차하는 방향을 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눈이 빠르다는 걸 설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았다.
"두 번째. 같이 사십니까."
"네."
설희가 먼저 답했다. 서윤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옆에서 느껴졌다.
"세 번째. 결혼식 일정은요."
"현재 협의 중입니다."
"네 번째. 이 합병이 결혼과 관련 있다는 보도에 대해서."
설희가 답하기 전에 서윤이 말했다.
"결혼이 합병을 만든 게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는 두 사람이 합병을 선택했습니다."
장미라가 체크 표시를 했다. 서윤의 답은 기록됐다.
설희는 그 답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답이 왜 '안전'한지를 이제 알았다.
*
"손잡기는 어떻게 할 겁니까."
서윤이 물었다. 질문이 아니라 체크리스트 항목을 읽는 목소리였다.
"공식 석상에서 자연스럽게 하면—"
"손이 어색하면 기자가 먼저 알아챕니다. 봐요."
서윤이 설희 쪽으로 왔다. 설희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서윤이 그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잡아보세요."
설희는 잠깐 멈췄다. 계약서 조항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연기의 범위는 두 당사자가 사전 합의한 수준을 초과하지 않는다.' 이건 그 안이었다. 분명히.
손을 얹었다.
서윤의 손바닥이 넓었다. 체온이 설희보다 높았다. 서윤이 엄지를 설희의 엄지 위로 얹었다. 그리고 손등을 살짝 쥐었다.
"이렇게. 각도가 중요합니다. 측면에서 봤을 때 자연스러워야 해요."
설희는 그 말을 들었다. 들으면서 손목에 맥박이 올라오는 걸 알았다.
"끊겠습니다."
"왜요."
"연기 범위입니다."
"아직 공식 석상 기준치를 확인 안 했는데요."
서윤이 손을 놓지 않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설희는 놓지 못했다. 그게 더 문제였다.
"......하겠습니다."
"뭘요."
"계속 하겠습니다."
서윤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피식, 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종류의.
"이건 연기죠."
말했다. 그리고 한 박자 뒤에 덧붙였다.
"심장은 연습 안 하셨습니까?"
설희가 서윤을 봤다.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수 없었다.
장미라가 기침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그쪽을 봤다.
"다음 항목 갈게요."
*
장미라의 태블릿이 진동했다.
리허설 일곱 번째 항목 도중이었다. 장미라가 화면을 확인하더니 설희 쪽을 봤다. 눈이 달라져 있었다.
"경호팀에서 연락 왔습니다."
설희가 펜을 놓았다.
"어제 보안 로그에 찍힌 패키지 수령 건이요. CCTV 사각지대에서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경호팀이 커버하지 못하는 서비스 엘리베이터 쪽."
서윤이 팔짱을 풀었다.
"서비스 엘리베이터에 별도 인증이 없습니까."
"건물 공용 시스템입니다. PH129 전용이 아니에요."
서윤과 설희가 동시에 같은 계산을 했다. 이중 생체인증은 현관에만 걸려 있었다. 서비스 동선은 건물 관리 측 관할이었다. 보안의 벽이 아니라 틈이었다.
"오 팀장에게 연락해요. 서비스 동선 CCTV 확보. 오늘 중으로."
서윤이 말했다. 장미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리허설은 중단되지 않았다.
*
리허설이 끝나고 장미라는 서류철을 정리했다. 테이블 위에 파일이 쌓였다. 그 파일 아래에서 클리어 파일 하나가 비어져 나왔다.
장미라가 그것을 꺼내서 설희 앞에 놓았다.
"이거, 정리 중에 나왔습니다."
설희가 내려다봤다.
성북동 본택 등기 사본. 그 아래 손으로 쓴 메모. 오래된 법인 이름 하나. 숫자 세 자리.
"회장님 쪽 오래된 법인입니다. 법인 이름이 현재 등기와 일치하지 않아요. 흔적이 있습니다."
설희가 그 메모를 봤다. 눈이 한 번 빗나갔다.
아버지의 언어였다. 설희가 가장 잘 알고 가장 혐오하는 종류의 언어. 숫자를 계좌 아닌 곳에 묻어두는 방식. 가문이 대대로 써온 생존 방식.
서윤이 그쪽을 봤다.
"뭡니까."
설희가 파일을 덮었다. 천천히. 소리 나지 않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서윤은 그 말을 들었다. 파일 위에 올려진 설희의 손을 봤다.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더 묻지 않았다.
설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스 연기 범위 확인은 내일로 미루겠습니다."
"리허설 일정이—"
"내일로 미루겠습니다."
두 번 말했다. 그게 대화의 끝이었다.
설희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서윤이 테이블 위 파일을 봤다. 덮인 채로 있었다.
장미라가 말하지 않고 그쪽을 봤다. 그러다 시선을 거뒀다.
"내일 리허설 일정 조정하겠습니다."
그리고 낮게 덧붙였다.
"그 파일 복사본이요. 방금 누군가 서재 프린터에서 출력한 이력이 있습니다."
서윤이 그 말을 들었다. 장미라를 봤다.
장미라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서윤의 숨이 가까워지자, 설희는 계산을 잃었다.
연습인데, 왜 도망치고 싶지 않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