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무림에 환생하다
제1화: 그 이름
나는 왕이었다.
조선의 제3대 왕, 태종.
사관들은 나를 건국의 주역이라 불렀고, 제도의 설계자라 했으며, 세종대왕의 아버지라는 수식어도 붙여줬다. 하지만 백성들이 가장 많이 쓰는 이름은 따로 있었다.
킬방원.
동생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형을 밀어내고 왕좌를 굳혔다. 처남 넷의 목을 베어 외척을 정리했으며, 공신을 토사구팽했다. 아버지와는 이십 년을 원수로 살았다.
피로 길을 닦아 태평을 만들었다. 세종이 한글을 짓고 해시계를 세울 수 있었던 건, 내가 더러운 일을 전부 해치웠기 때문이다. 아들은 깨끗한 판 위에서 성군이 되면 그만. 그게 내 계획이었고, 계획대로 됐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대가만 빼면.
죽음이 목끝에 닿았을 때 떠오른 건 옥새도 업적도 아니었다. 원체 고기를 좋아하는 아들놈이, 상중에 제대로 못 먹을 게 뻔했다.
“충녕아. 고기 많이 먹어라.”
그게 유언이었다. 참 별것 없는 56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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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웠다.
눈을 뜨기도 전에 온몸이 불이었다. 이불은 땀으로 흥건하고, 관자놀이를 대장간 망치로 두들기는 것 같았다. 숨을 쉬려는데 폐가 말을 안 듣는다.
폐가 작다. 숨을 들이켜도 가슴팍이 금세 차오른다. 고열 때문이 아니라, 육신 자체가 아직 여물지 않은 탓이다.
손을 움직여봤다. 움직인다. 손가락 다섯 개. 하지만 이건 내 손이 아니었다. 마디도 없고, 굳은살도 없고, 도톰하고 보드라운 게 56년을 산 사내의 손이 아니다.
아이의 손이다.
눈을 떴다. 나무 천장. 서까래에 먼지가 쌓여 있고 한쪽 귀퉁이에 거미줄이 걸려 있었다. 창덕궁이 아니다. 조선의 어떤 궁궐과도 닮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팔에 힘이 안 들어갔다. 고열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 몸 자체가 작았다.
일곱 살. 많아야 여덟.
또 막내에 형이 셋이라니. 상제(上帝)의 농치고는 고약하기 짝이 없구나. 전생에서 형제 문제로 나라를 뒤집어놓은 인간한테, 기어이 또 형 셋 딸린 막내를 줬다. 환생을 시켜 줬으면 고맙다고 해야 하나, 이 기막힌 배치에 항의를 해야 하나.
기억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천룡세가’. 무림세가의 넷째이자 막내. 아버지는 가주, 어머니는 나를 낳고 세상을 떠났다. 이 아이는 사흘 전부터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원래도 허약한 편이었는데 가을비에 젖은 뒤 의식을 잃었고, 그 빈자리에 내가 들어온 것이다.
56년짜리 피로가 싹 빠져 있었다. 관절도 안 아프고, 이명도 없고, 노안도 아니다. 이 두통만 좀 어떻게 되면 딱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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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머릿속이 맑아졌다. 반세기의 본능이다.
조심스럽되 무거운 걸음. 발바닥 전체로 대지를 딛되 바닥을 울리지 않는다. 나는 전생에서 수십 년간 무장들의 호위를 받으며 살았다. 이화, 이천우, 조영무. 수십 년을 곁에 두었던 무장들의 발소리를 눈 감고도 구분할 수 있었다. 이 발소리는 최소 20년 이상 병장기를 손에서 놓지 않은 고수(高手)의 것이다.
문이 열렸다. 장신의 사내가 들어섰다. 넓은 어깨에 곧은 허리, 검게 묶어 올린 머리카락. 마흔 중반쯤으로 보이는데 눈 밑에 피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사흘째 잠을 못 잔 눈이다. 하지만 사흘치 피로만은 아니었다. 자리가 무거우면 눈 밑이 먼저 꺼지는 법이다.
아이의 기억이 올라왔다. 아버지. 천룡세가의 가주.
사내가 침상 옆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넓은 손이 내 이마 위로 다가왔다. 그 순간, 내 몸이 움찔했다. 반사적이었다. 누군가의 손이 머리 위로 올라오면, 그건 칼을 내리치기 직전이다. 그렇게 배웠다. 전생에서 내 머리에 손을 올린 사람은, 죽이려는 자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손은 이마를 가만히 짚었을 뿐이었다.
“열이 좀 내렸구나.”
안도가 묻어 있는 묵직한 목소리. 수천 명의 보고를 들으며 진심과 거짓을 구분해온 귀가 말해주고 있었다. 안도의 밑에 깔린 미세한 떨림까지 들린다. 무인이 목소리를 떠는 건, 검 앞에서가 아니라 잃을 것 앞에서다.
이 사람은 진짜로 걱정하고 있다.
“괜찮으냐, 막내야.”
그 한마디에 가슴이 뚫렸다.
전생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는 강한 사람이었다. 활을 쏘면 천둥 같았고, 나라를 세우며 태조가 되었다. 하지만 아들에게 ‘괜찮으냐’라고 물은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함흥에서 차사들의 목만 돌아왔을 때도, 나는 그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7세의 성대에서 나온 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600년짜리 갈증이었다. 나, 조선의 태종. 피의 군주라 불리던 사내가 7살짜리의 몸으로 엉엉 울었다. 가주의 큰 손이 내 등을 감쌌다.
“울어라. 사흘이나 앓았으니 무섭기도 했겠지.”
따뜻했다.
전생의 끝에서 딱 하나 후회한 게 있었다. 아버지와 화해가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왕이 되고서야 깨달았다. 왕좌보다 무거운 게 효도였다는 걸.
이번에는 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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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이 잦아들자, 이제야 방이 보였다.
벽의 서화는 칼끝처럼 날카로웠고, 가구는 빈틈이 없었다. 창 너머로 기와지붕이 겹겹이 이어졌다. 한 채가 아니라, 세가(世家)였다.
방 한쪽엔 검가(劍架)가 있었다. 가장 위의 검은 일곱 살 생일에 아버지가 준 것이라 했다. 아이의 검.
그 검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먼저 움직이려 했다. 이 아이의 기억 속 형제들의 얼굴, 세가의 권력 구조.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 왕궁이든 무림이든, 결국은—
아니. 멈추자.
그때 바깥 공기가 깨졌다.
발소리였다. 여럿이다. 급하다. 아까 아버지의 걸음과는 전혀 달랐다. 소리를 죽이려는 의도 자체가 없는, 아니 그럴 여유조차 없는 다급한 발소리.
문이 벌컥 열렸다. 갑옷을 걸친 무인이 뛰어 들어왔다. 안색이 하얗고 왼쪽 어깨에 피가 번져 있었다. 타인의 피는 겉옷에 비산(飛散)하고, 제 피는 속살에서부터 배어 나오는 법. 그건 분명 자신의 피였다. 그리고 이 무인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부상의 고통이 아니다. 저건 상황 자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자의 눈이다.
“가주님! 동쪽 별채에 침입자입니다!”
아버지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들의 이마를 짚던 손이 허리춤의 검병(劍柄)으로 옮겨가는 그 짧은 찰나. 따뜻함이 증발하고 그 자리에 전쟁을 결심한 자의 살기(殺氣)가 차올랐다.
나는 알아보았다. 내가 전생에서 가장 많이 지었던 표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