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좋은 남편은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D-108. 성수동 사무실. 서지혁이 테이블 위에 핸드폰 두 대를 나란히 놓았다.
"녹음은 이걸로 합니다."
하나는 연화의 핸드폰이었다. 다른 하나는 서지혁이 가져온 보조 기기였다. 화면 보호 필름이 붙어 있지 않은 새 폰. 번호가 개통되어 있었다.
"통화 녹음이 아닙니다. 대면 녹음입니다. 대화의 한쪽 당사자인 한연화 씨가 직접 녹음하는 겁니다."
서지혁이 보조 기기의 녹음 앱을 열었다. 기본 탑재 앱이었다. 화면 하단에 빨간 원이 떠 있었다.
"핸드백 안에 넣어두십시오. 지퍼는 열어둡니다. 원단이 마이크를 막으면 소리가 뭉칩니다."
연화는 자신의 핸드백을 봤다. 르메르 소프트백. 안감이 얇았다. 소리가 통과할 수 있는 구조였다.
"녹음 시작 후 화면이 꺼져도 앱은 돌아갑니다.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고 녹음만 실행합니다."
연화는 보조 기기를 손에 들었다. 무게가 가벼웠다. 핸드백 안에 넣으면 티가 나지 않을 무게였다.
"어떤 말을 끌어내야 합니까."
연화가 물었다. 서지혁이 서류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A4 한 면에 네 줄이 적혀 있었다.
하나, 경제적 통제를 암시하는 발언. 생활비, 카드 사용, 지출 결정권.
둘, 행동 제한을 암시하는 발언. 외출, 만남, 일정 통제.
셋, 외도를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발언. 시간, 장소, 제삼자 언급.
넷, 이혼을 위협 수단으로 사용하는 발언.
연화는 네 줄을 읽었다. 전부 태욱이 10년간 해온 말이었다. 다만 태욱은 이 네 가지를 한 번도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태욱은 소리를 지르지 않아요."
연화가 말했다. 서지혁이 연화를 봤다.
"카드를 뺏지도 않아요. 대신 제가 뭘 샀는지 물어봐요. 매번. 왜 샀는지, 꼭 필요한 건지, 다음엔 말하고 사라고. 한 번도 안 된다고 한 적은 없어요."
서지혁이 펜을 놓았다.
"나가지 말라고도 안 해요. 대신 몇 시에 돌아오는지 물어요. 누구 만나는지 물어요. 만나고 오면 표정이 달라져요. 화내는 건 아니에요. 그냥 조용해져요. 그 조용함이 이틀쯤 가요. 그러면 다음부터는 약속을 안 잡게 돼요."
연화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하지만 문장 사이의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서지혁은 그 간격을 듣고 있었다.
"밖에서 보면 다정한 남편이에요. 생일에 꽃을 보내요. 기념일에 선물을 해요. 제 앞에서 절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요."
연화가 서지혁을 봤다.
"부드러운 칼은 자국을 남기지 않아요."
서지혁이 잠깐 침묵했다. 연화의 마지막 문장이 공기 속에 남아 있었다. 서지혁은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펜을 다시 들었다.
"그래서 유도가 필요한 겁니다."
서지혁이 A4 종이 뒷면에 적었다.
"질문은 짧게 하십시오. 대답은 상대가 길게 하도록 유도합니다. 카드를 쓴 뒤에 먼저 말하지 마십시오. 태욱 씨가 물어보게 두십시오. 그리고 대답한 뒤, 이렇게 되물으십시오."
서지혁이 적었다. "제가 쓸 때마다 물어보시는 거예요?"
서지혁이 펜을 내려놓고 연화를 봤다.
"해보시죠. 제가 태욱 씨라고 생각하고."
서지혁이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팔짱을 끼지 않았다. 식탁 맞은편에 앉은 남편의 자세였다. 태욱은 저렇게 앉지 않는다. 태욱은 와인잔을 돌리면서 묻는다. 하지만 중요한 건 자세가 아니라 문장이었다.
연화가 입을 열었다. "제가 쓸 때마다 물어보시는 거예요?"
목소리가 딱딱했다. 서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평소처럼 하십시오. 묻는 게 아니라, 확인하는 겁니다."
연화가 숨을 내쉬었다. 다시.
"제가 쓸 때마다 물어보시는 거예요?"
이번에는 달랐다. 10년간 써온 말투였다. 정중하고, 조심스럽고, 상대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어조. 서지혁이 끄덕였다.
"그겁니다."
서지혁의 대답이 짧았다. 연화는 자신의 목소리가 그렇게 들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매일 써온 말투인데, 밖에서 들으니 조심의 무게가 달랐다.
"녹음 중에 연기하지 마십시오. 일부러 피해자처럼 말하거나, 울거나, 과장하지 마십시오. 법원은 감정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서지혁이 서류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문 앞에서 멈췄다.
"평소처럼 하십시오. 평소가 이미 충분히 비정상이니까."
그 문장이 남았다. 서지혁이 나간 뒤에도. 10년간 평소였던 것이, 밖에서 보면 비정상이었다. 안에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밖에서는 선명했다. 연화는 그 거리감을 처음으로 의식했다.
보조 기기를 핸드백에 넣었다. 지퍼를 열어두었다. 거울을 봤다.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그 평소를 유지하면 됐다.
저녁 7시. 한남동.
현관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네 자리. 태욱의 생일이었다. 10년 전 입주할 때 태욱이 설정한 번호.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연화의 생일은 아무 곳에도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문을 열었을 때, 예상하지 못한 풍경이 있었다. 식탁에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태욱이 직접 시킨 것이었다. 정갈한 한식 코스. 갈비찜, 전복죽, 도라지무침. 간장 종지까지 놓여 있었다. 태욱이 식탁 의자를 당기며 서 있었다.
"오늘 일찍 끝났어. 같이 먹자."
연화의 발이 현관에서 멈췄다. 핸드백 안에 보조 기기가 있었다. 녹음 버튼은 아직 누르지 않았다. 계획은 다음 주였다. 오늘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회는 계획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손 씻고 올게요."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을 잠갔다. 핸드백을 열었다. 보조 기기를 꺼냈다. 비행기 모드. 녹음 앱. 빨간 원. 손가락이 멈췄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봤다. 지금 저 식탁에 앉으면, 남편과의 저녁 식사가 녹음 현장이 된다. 밥을 먹으면서 증거를 수집하는 아내. 그 이미지가 낯설었다.
하지만 전 타임라인에서 연화는 이 식탁에서 10년을 먹었다. 웃으면서. 참으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면서. 이번에는 남긴다.
빨간 원을 눌렀다. 녹음이 시작됐다. 0:01. 0:02. 보조 기기를 핸드백에 넣었다. 지퍼를 열어둔 채 식탁 옆 의자 위에 놓았다. 평소에도 핸드백은 그 자리에 놓았다.
식탁에 앉았다. 태욱이 맞은편에 앉았다. 전복죽을 먼저 떴다.
"언제 시켰어요?"
"한 시간 전쯤. 압구정 그 집."
연화가 아는 식당이었다. 시어머니 정명희가 좋아하는 곳. 태욱이 이 식당을 시킬 때는 보통 이유가 있었다.
"무슨 날이에요?"
"무슨 날이어야 밥을 시켜?"
태욱이 웃었다.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연화는 그 웃음의 온도를 쟀다. 무언가를 시키기 전에 먼저 상을 차리는 사람. 태욱의 패턴이었다.
갈비찜을 먹었다. 서지혁의 말이 떠올랐다. 먼저 말하지 마십시오. 물어보게 두십시오.
기다렸다. 태욱이 와인을 따랐다.
"다음 주 토요일에 어머니 생신이야."
연화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작년에 신라호텔이었죠?"
"올해는 집에서 하자고 하셔. 형수님이 준비하시는데, 당신도 좀 도와줘."
'도와줘.' 형수는 메뉴를 정하고, 연화는 테이블 세팅부터 디저트까지 전부 했다. 10년간 반복된 구조였다. '돕는다'는 말의 실제 무게는 '한다'였다.
"제가 뭘 하면 돼요?"
"어머니한테 물어봐. 형수님이랑 이야기하고."
태욱이 갈비찜 한 점을 연화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10년간 이 동작을 해온 손이었다.
"제가 직접 전화하면 돼요?"
"왜? 문제 있어?"
연화는 젓가락을 내려놓지 않았다. 내려놓으면 티가 난다. 평소처럼. 서지혁의 말이 스쳤다.
"아니요. 내일 연락할게요."
태욱이 와인을 마셨다. 화제가 넘어갔다. 연화는 다음 기회를 기다렸다. 서두르지 않았다. 전복죽을 한 숟가락 떴다. 따뜻했다. 갈비찜 한 점을 더 집었다. 간이 적당했다.
"참, 지난주에 백화점 갔어?"
왔다. 연화의 손가락이 테이블 아래에서 미세하게 움직였다. 카드 내역을 본 것이었다. '갔어?'로 시작하는 질문. 확인의 형태를 빌린 감시.
"네. 하경이 생일 선물 사러요."
"뭐 샀어?"
"스카프요."
"얼마짜리?"
세 번째 질문이었다. 연화는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손이 차가웠다.
"사십이만 원이요."
잠깐 멈췄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물었다.
"제가 뭘 살 때마다 물어보시는 거예요?"
태욱의 숟가락이 멈췄다. 1초.
"물어보면 안 돼? 부부잖아."
'부부잖아.' 그 세 글자면 충분했다.
"그렇죠."
연화는 더 밀지 않았다. 한 번에 끝내려 하면 부자연스러워진다. 태욱이 와인잔을 기울였다. 표정이 풀려 있었다. 의심은 없었다.
"하경이 요즘 자주 만나?"
"한 달에 한두 번요."
"다음에 만날 땐 미리 말해. 내가 저녁 일정 맞춰줄게."
연화의 손이 무릎 위에서 멈췄다. 미리 말해. 내가 맞춰줄게. 핸드백 안에서 빨간 원이 돌고 있었다. 녹음기는 이 문장을 듣고 있었다.
"네, 그럴게요."
태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대답을 받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식사가 끝났다. 연화가 그릇을 정리하려는데 태욱이 말했다.
"놔둬. 이따 하면 되지."
부드러운 말이었다. 연화는 알고 있었다. '이따 하면 되지'는 '지금 하지 마'였다. 태욱이 소파로 이동한 뒤에, 연화가 조용히 치우는 것. 이 집의 순서였다. 태욱이 보는 앞에서 치우면, 태욱이 불편해했다. 자기가 치우지 않는 모습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었다.
"네."
태욱이 소파로 갔다. 텔레비전을 켰다.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거실을 채웠다. 연화는 식탁에 앉아 있었다. 핸드백이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 녹음은 계속 돌고 있었다. 이 식탁에서 10년을 먹었다. 같은 자리, 같은 구조, 같은 대화. 달라진 건 하나뿐이었다.
화장실로 갔다. 문을 잠갔다. 핸드백에서 보조 기기를 꺼냈다. 녹음 정지. 47분 23초. 파일이 저장됐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차가운 수도꼭지를 틀었다. 손을 담갔다. 떨림이 멈추는 데 10초가 걸렸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봤다. 평소와 같았다. 식사하는 내내 평소와 같았다. 그게 가장 무서운 부분이었다.
이어폰을 꽂았다. 되감았다. 태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어보면 안 돼? 부부잖아." 더 감았다. "다음에 만날 땐 미리 말해. 내가 저녁 일정 맞춰줄게."
두 문장. 첫 번째는 일상으로 읽힐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달랐다. 배려의 언어로 포장된 사전 승인 요구. 이건 쌓을 수 있는 문장이었다.
서지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47분. 첫 녹음했습니다."
답이 30초 만에 왔다. "내일 파일 보내주십시오. 검토하겠습니다."
감정이 없는 답이었다. 잘했다도, 수고했다도 없었다. 연화는 그 방식이 오늘따라 편했다.
보조 기기를 핸드백에 다시 넣었다. 화장실을 나왔다.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태욱은 뉴스를 보고 있었다. 연화가 지나가는 것을 보지 않았다. 소파 옆 사이드 테이블에 와인잔이 놓여 있었다. 절반쯤 남아 있었다. 연화는 그 잔을 보지 않고 지나갔다.
침실에 들어갔다. 문을 닫았다. 이불 위에 앉았다. 등을 벽에 기댔다.
핸드폰이 울렸다. 하경이었다.
"언니, 내일 저녁에 시간 돼?"
"왜?"
"삼겹살 먹자. 내가 살게."
연화는 입꼬리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하경의 타이밍은 늘 이랬다. 연화가 가장 건조해진 순간에, 생활의 언어로 들어왔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캐지 않고, 삼겹살을 들고 왔다.
"하경아."
"응?"
"삼겹살 말고 냉면 먹자."
"이 더운 날에 냉면? 좋지. 을지로 그 집 아직 있나?"
"있을걸."
"그럼 내가 예약할게. 여섯 시?"
"여섯 시."
"알겠어. 언니."
전화를 끊었다. 창밖에 한남동 아파트 단지의 가로등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 풍경을 10년간 봤다.
침대에 앉았다. 이어폰을 다시 꽂았다. 47분 23초. 재생을 눌렀다. 태욱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자신의 목소리도 들었다. 정중하고, 조심스럽고, 상대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어조. 10년간 써온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에 대답하는 태욱의 목소리. 부드럽고, 합리적이고, 어디에도 폭력이 없는 목소리. 그 두 목소리 사이에 보이지 않던 벽이 있었다.
재생이 끝났다. 화면에 파일 하나가 남아 있었다. 증거라 부르기엔 아직 가벼웠다. 하지만 비어 있던 폴더에 처음으로 파일이 생겼다. 빈 폴더와 파일 하나짜리 폴더는 다른 것이었다.
연화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