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가문은 며느리를 먹고 자란다
D-108. 한남동에서 삼성동까지 차로 이십 분이었다. 태욱이 직접 운전했다. 시댁 가족 식사에는 기사를 쓰지 않는 것이 이 집의 규칙이었다. 가족 일에 외부인을 끼우지 않는다는 원칙. 그 원칙의 실제 의미는 달랐다. 기사가 보는 것과 듣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연화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종이 쇼핑백이 놓여 있었다. 정명희에게 가져갈 제주 녹차. 백화점 지하 1층, 한정판. 연화가 고른 것이 아니었다. 태욱의 비서실에서 미리 준비한 것이었다. 연화의 이름으로, 연화의 손으로 건네지지만, 선택은 연화의 것이 아니었다. 이 집에서 연화의 것인 건 별로 없었다.
태욱이 앞을 보며 말했다.
"요즘 컨설팅 쪽 사람 만난다며?"
연화의 손이 쇼핑백 리본 위에서 멈췄다. 며칠 전 세나에게 흘린 가짜 정보였다. 컨설팅 미팅이 있다고. 그것이 태욱의 입에서 나왔다. 경로는 하나였다. 세나에서 비서실로, 비서실에서 태욱으로.
"행사 후속 정리 건이에요. 해외 투자자 측 인사를 마무리하는 중이라."
"그런 건 재단 사무국에 맡기면 되잖아."
"제가 직접 관여한 부분이 있어서요."
태욱이 핸들을 잡은 손을 고쳐 쥐었다.
"앞으로 외부 미팅 잡으면 미리 알려줘. 내가 일정 봐서 기사 붙여줄게."
"네. 고마워요."
연화는 창밖을 봤다. 한남대교 위. 한강이 어둡게 흘렀다.
삼성동 본가. 대문에서 현관까지 이십 보. 잔디가 짧게 깎여 있었다. 가로등이 정원 양쪽에 두 개씩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잔디의 색이 고르게 보이는 조명 설계. 이 집은 보이는 모든 것이 관리되어 있었다.
현관이 열렸다. 가정부 김 여사가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연화는 신발을 벗으며 집 안을 훑었다. 거실 너머 다이닝 룸에 불이 켜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 백자 화병. 연화가 지난번에 가져온 것이었다. 놓인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정중앙에서 왼쪽으로. 정명희의 언어는 이렇게 작동했다. 말이 아니라 배치로.
"왔니."
정명희가 다이닝 룸에서 나왔다. 검은 캐시미어 가디건에 진주 귀걸이. 집에서도 격식을 갖추는 사람이었다. 그 격식이 갑옷이었다.
"어머니, 잘 지내셨어요?"
연화가 쇼핑백을 건넸다. 정명희가 받아들었다.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비서실이 보고했을 것이었다.
"고맙다. 들어오렴."
식탁은 네 자리였다. 정명희, 태욱, 연화.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태욱의 형, 강태준은 미국 출장 중이었다. 태준이 있으면 정명희의 시선이 분산됐다. 태준이 없으면 시선은 연화에게 모였다.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한우 불고기, 된장찌개, 나물 세 가지, 잡채. 가정부의 손이었지만, 메뉴 구성은 정명희의 결정이었다. 화려하지 않았다. 손님이 아니라 가족이니까.
연화는 자리에 앉았다. 수저를 들기 전에 정명희의 수저를 기다렸다. 이 집의 식사는 정명희가 먼저 수저를 들어야 시작됐다. 연화는 그 순서를 10년간 한 번도 어긴 적 없었다.
정명희가 수저를 들었다. 태욱이 들었다. 연화가 들었다.
"먹자."
정명희의 한마디로 식사가 시작됐다. 조용했다. 수저 소리. 그릇 소리. 침묵 사이에 누가 먼저 입을 여느냐가 힘의 구조였다.
정명희가 된장찌개를 한 숟갈 뜨고 나서 입을 열었다.
"연화야."
"네, 어머니."
"지난번 행사 사진 봤다. 박 이사 부인하고 같이 찍은 거."
"아, 네. 인사드렸어요."
"네 옆에 있으면 박 이사 부인이 초라해 보이더라. 그건 좋은 게 아니야."
연화의 수저가 멈추지 않았다. 나물을 집어 입에 넣었다. 씹었다. 삼켰다.
"죄송해요. 다음에는 조심할게요."
"조심이 아니라, 감각이야. 옆 사람을 세워주는 게 네 역할이지."
정명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식탁 위의 된장찌개처럼 따뜻한 온도.
연화는 나물을 한 젓가락 더 집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어머니, 그러면 박 이사 부인 쪽 동선은 제가 다시 맞춰볼까요? 다음 행사 때 자리 배치도 제가 조율하면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요."
먼저 던진 질문이었다. 전 타임라인에서는 하지 않았던 종류의 말. 고개를 숙이되, 그 안에 시험을 넣었다. 정명희가 받으면 떠넘기기. 거절하면 축소. 어느 쪽이든 방식이 드러난다.
정명희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연화를 봤다.
"그래. 네가 하렴. 박 이사 부인이 다음 자선경매에도 오거든, 동선 겹치지 않게 네가 알아서 잡아."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네, 어머니."
정명희는 다시 찌개를 떴다. 연화에게 일을 시킨 것이 아니라 기회를 준 것이라는 얼굴이었다.
태욱이 불고기를 집으면서 말했다.
"어머니, 연화도 나름 잘한 거예요. 행사장 반응도 좋았고."
정명희가 태욱을 봤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연화가 배우질 않아."
"제가 부족한 거 맞아요."
연화가 말했다. 짧게. 시선은 찌개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근데 어머니."
정명희의 수저가 멈췄다. 이 식탁에서 연화가 '근데'를 쓴 적은 없었다.
"지난번 행사장에서 해외 투자자 리셉션 동선, 제가 잡았거든요. 박 이사 부인이 그쪽 테이블 배치를 부탁하셔서요."
"그래서?"
"옆에 서 있었던 건 사진 때문이 아니라 동선 때문이에요. 투자자분들 자리 안내를 제가 했으니까요."
연화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톤이 올라가지 않았다. 반박이 아니라 사실을 전달하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이 식탁에서 며느리가 사실을 전달하는 것 자체가 반격이었다.
정명희의 눈이 연화에게 고정됐다. 2초. 3초. 입꼬리가 미세하게 내려갔다.
"동선을 잡은 건 좋다만. 사진에 남는 건 동선이 아니라 얼굴이야."
"알겠습니다."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평소보다 얕았다. 정명희는 그 차이를 느꼈을 것이었다.
식사가 계속됐다. 태욱은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다.
잡채를 먹으면서 연화는 테이블 위를 봤다. 정명희 앞에 불고기와 찌개. 태욱 앞에 나물과 잡채. 연화 앞에는 밑반찬이 집중되어 있었다. 메인 요리와의 거리가 가장 멀었다.
디저트가 나왔다. 수박. 가정부가 접시에 담아왔다.
정명희가 수박을 한 조각 들고 입에 넣었다. 씨를 냅킨에 뱉고 말했다.
"연화야, 요즘 밖에 자주 나간다며?"
연화의 등에 차가운 것이 스쳤다.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행사 정리 건으로 사람들 만나는 거예요."
"행사 정리가 그렇게 오래 걸리니?"
"마무리할 게 좀 있어서요."
정명희가 수박을 내려놓았다. 냅킨으로 손가락을 닦았다. 천천히. 검지, 중지, 약지 순서로.
"태욱이가 걱정하더라."
연화는 태욱을 보지 않았다.
"걱정하실 일 아니에요."
"걱정하지 말라는 건 걱정되는 일이 있다는 뜻이지."
정명희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태욱이 물을 마셨다. 입을 열지 않았다. 어머니의 질문이 진행 중일 때 끼어들지 않는 것도 이 집의 규칙이었다.
"요즘 누구 만나는 거야. 행사 건이면 재단 사무국 라인에서 할 일이지, 네가 직접 뛸 이유가 있어?"
연화는 수박을 한 조각 집었다. 입에 넣었다. 씹으면서 시간을 벌었다.
"제가 관여한 부분이 있어서요. 해외 투자자 측 후속 인사를 제가 직접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사실의 일부만 꺼낸 것이었다.
정명희가 연화를 봤다. 시선이 연화의 얼굴을 훑었다. 눈, 입, 턱선. 거짓을 찾는 눈이 아니었다. 변화를 찾는 눈이었다.
"판단은 네가 하는 게 아니야."
한 문장이었다. 조용했다.
연화의 손이 수저 위에 놓여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니."
"응."
"가문이 절 필요로 한 건 며느리였지, 사람이 아니었죠."
수저 소리가 멈췄다. 시계 소리가 들렸다. 거실 벽에 걸린 독일제 벽시계. 평소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정명희의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태욱이 연화를 봤다. 눈이 좁아졌다.
"연화야."
정명희의 목소리가 반 톤 낮아졌다.
"사람 값을 매기고 싶으면, 먼저 값을 증명해야지."
연화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수박을 한 조각 더 집었다. 입에 넣었다. 씹었다. 삼켰다.
"맛있네요, 수박."
정명희가 냅킨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식사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현관으로 나왔다. 구두를 신는데 정명희가 뒤따라 나왔다. 태욱은 화장실에 갔다.
정명희와 연화, 둘만 남은 현관.
"연화야."
목소리가 달랐다. 식탁에서의 톤이 아니었다. 더 낮고, 더 직접적이었다.
"요즘 너, 누가 바람 넣니?"
"무슨 말씀이세요."
"말이 달라졌어. 눈이 달라졌어."
정명희가 한 발 가까이 왔다. 향수 냄새. 진한 장미. 연화는 물러서지 않았다.
"네가 변하는 건 상관없어. 이 집 밖에서 변해. 이 식탁에서는 네 자리를 지켜."
태욱이 화장실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정명희가 한 발 물러섰다.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전환이 매끄러웠다.
"조심해서 가렴."
차에 탔다. 태욱이 시동을 걸었다. 삼성동 골목을 빠져나왔다.
"아까 그 말."
태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니한테 왜 그래."
"사실을 말한 거예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야. 자리가 중요한 거야."
태욱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
"나도 당신 편하게 해주고 싶은 건데, 그렇게 나오면 내가 곤란해져."
"네. 알겠어요."
연화는 창밖을 봤다. 한남대교 위. 다리 위 가로등이 물 위에 줄을 그었다.
집에 도착했다. 태욱은 서재로 직행했다. 문이 닫혔다.
연화는 침실에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수첩을 꺼냈다.
한 줄만 적었다.
지혁 접촉 흔적 금지. 정명희가 찾는 '바람'이 지혁으로 특정되면 불륜 프레임.
수첩을 닫았다. 욕실장 안쪽에 넣었다.
핸드폰을 들었다. 하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무슨 일이야?"
"나 오늘 식탁에서 좀 말했어."
"뭐라고?"
"가문이 날 필요로 한 건 며느리였지,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경이 잠깐 침묵했다.
"잘했어."
하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울 것 같은 떨림이 아니었다. 화가 난 떨림이었다.
"잘했어, 언니. 진작에 그랬어야 돼."
연화의 눈이 뜨거워졌다. 참았다.
"……밥은 먹었어?"
"언니가 지금 밥 걱정이야?"
연화가 입꼬리를 올렸다. 하경은 보지 못하는 웃음이었다.
전화를 끊었다. 침대에 누웠다.
정명희의 촉은 거의 틀리지 않았다. '바람 넣는 사람'을 찾을 것이다. 찾기 전에, 연화가 먼저 방향을 심어야 했다.
이세린. 이혼 후 독립한 여성 사업가. 선배 여성과의 교류. 의심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의 영역. 정명희가 이세린을 조사해도, 나오는 것은 불륜이 아니다. 서지혁의 이름은 가려진다.
새벽 1시. 태욱이 서재에서 나와 침실에 들어왔다. 연화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든 척이었다. 태욱이 옆에 누웠다. 숨소리가 고르게 변하기까지 15분.
연화는 눈을 떴다. 핸드폰을 열었다. 이세린의 이름을 찾았다. 메시지를 쳤다.
선배님, 요즘 커피 한잔 가능하실까요. 여쭤볼 게 있어서요.
전송.
화면을 끄고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어둠 속에서 정명희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남아 있었다. '값을 증명해야지.'
증명은 하겠다. 다만 채점자를 바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