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완벽한 며느리 사용 설명서
꽃은 수국이었다.
D-114.
대한문화재단 창립 30주년 기념 리셉션. 호텔 그랜드볼룸. 연화는 행사 세 시간 전에 도착했다. 볼룸 입구를 밀었을 때 에어컨 바람이 먼저 맞았다. 카펫 위로 스태프들이 오가고 있었다. 플로리스트가 원형 테이블 위에 수국을 올리고 있었다. 연보라색. 정명희가 지정한 색이었다. 수국은 꽃잎이 넓어서 적은 양으로도 풍성해 보인다. 비용 대비 효과가 좋은 꽃이었다. 정명희는 그런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연화는 테이블 배치도를 펼쳤다. A3 용지 위에 동그라미 30개. 300명. 지난 행사의 두 배 규모였다. 정명희가 직접 확정한 규모다. 이 행사는 정명희의 대외적 위상을 보여주는 자리였고, 동시에 대한그룹의 문화 후원 이미지를 시장에 각인시키는 자리였다. 연화의 이름은 어디에도 올라가지 않지만, 이 배치도를 그린 건 연화였다.
배치도 위에 연화의 메모가 빼곡했다. 테이블 번호 옆에 이름, 이름 옆에 관계, 관계 옆에 주의사항. 6번 테이블 정 전 장관 부부는 올해 손녀가 결혼했으니 축하 인사를 넣을 것. 14번 테이블 미술 재단 이사는 최근 경매에서 낙찰에 실패했으니 미술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말 것. 22번 테이블 K은행 부행장 부인은 작년에 이사장 직함을 달았으니 반드시 직함으로 호칭할 것.
사람들은 이런 것을 챙기는 사람을 '세심하다'고 불렀다. 연화는 그게 세심함이 아니라 생존이었다는 걸 알았다. 한 번의 호칭 실수가 일 년의 관계를 무너뜨렸다. 재벌가의 행사는 꽃과 와인으로 포장된 지뢰밭이었다.
정명희가 도착했다.
"리스트."
인사보다 먼저 손을 내밀었다. 연화가 프린트를 건넸다. 정명희가 훑었다. 펜으로 두 군데 체크했다.
"11번 테이블. 박 회장님 옆에 김 부회장을 넣었네."
"네. 작년 골프 모임에서 같은 조였다고 들었어요."
"골프는 맞는데, 그 뒤에 투자 건으로 틀어졌어."
연화의 손이 멈췄다. 전 타임라인에서는 이 정보를 몰랐다. 회귀 기억은 큰 사건의 흐름은 보여줬지만, 사람들 사이의 미세한 균열까지는 담고 있지 않았다.
"바꾸겠습니다."
"25번 테이블 비워둔 자리 두 개는?"
"혹시 예고 없이 오시는 분들을 위해 남겨둔 거예요."
정명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채워. 빈 의자는 없어야지."
"네."
정명희가 프린트를 돌려줬다. 돌아서다 멈췄다.
"연화야."
"네."
"오늘 태욱이 인사말 한다."
연화의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네, 알고 있어요."
정명희가 연화를 봤다. 2초.
"태욱이 올 때까지 무대 세팅 확인해."
사라졌다. 뒤돌아서는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연화는 프린트 위의 펜 자국을 봤다. 정명희의 글씨는 작고 정확했다. 체크가 아니라 사선으로 긋는 습관. 이 여자는 300명의 관계를 머릿속에 넣고 다녔다. 누가 누구와 틀어졌는지, 누구의 딸이 어디에 시집갔는지. 그중 연화의 위치는 언제나 '쓸모 있는 도구' 칸에 있었다.
11번 테이블 배치를 수정했다. 좌석 카드를 교체하면서, 옆 테이블의 카드도 다시 확인했다. 12번 테이블. 카드 열두 장 중 열한 장은 연화가 아는 이름이었다. 재단 이사, 후원사 대표, 정명희가 직접 챙기는 인사들. 열두 번째가 달랐다. 'YK인터내셔널'. 연화는 이 이름을 본 적이 없었다. 전 타임라인에서도, 회귀 후의 기억에서도.
카드를 뒤집었다. 배치 담당자의 필기가 있었다. '추가분 — 본부 직접 지정'. 본부. 전략기획본부. 태욱의 부서였다. 재단 행사의 좌석 카드를 재단이 아니라 그룹 본부에서 직접 지정한 것이었다. 재단 행사 초청 결정권은 정명희에게 있었다. 본부가 끼어들 이유가 없는 자리였다. 정명희가 이 카드를 체크하지 않은 것도 눈에 걸렸다.
카드를 내려놓았다. 기억해뒀다.
연화는 스태프 데스크로 돌아가 지난 행사의 발주 내역 파일을 열었다. 검색했다. YK인터내셔널. 초청자 목록에는 없었다. 하지만 발주 내역에는 있었다. 인쇄물 외주, 기념품 제작, 해외 연사 섭외 대행. 한 번은 인쇄, 한 번은 기념품, 한 번은 섭외. 같은 회사가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을 번갈아 맡고 있었다.
"연화 씨, 이 자리 아직 쓰세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사무국 스태프였다. 정산 서류를 들고 서 있었다. 연화는 화면을 닫았다. 한 번의 클릭. 동작에 흔들림은 없었다.
"아뇨, 다 했어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태프가 앉았다. 연화는 걸으면서 머릿속에 남은 것을 정리했다. YK인터내셔널. 초청 명부에 없던 이름. 본부 직접 지정 좌석. 항목이 매번 바뀌는 외주 발주. 네 가지. 스크린샷은 찍지 않았다. 서지혁의 말이 떠올랐다. 어떻게 확보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 정보는 연화가 업무상 접근할 수 있는 자료였다. 합법적 접근이었다. 하지만 화면을 더 오래 봤다면 의심을 살 수 있었다. 기억으로 충분했다.
행사가 시작됐다. 리셉션은 칵테일로 열렸다. 연화는 입구에서 게스트를 맞았다. 이름을 부르고, 안내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을 연결했다. 이 일을 10년 했다.
태욱이 도착했다. 남색 양복. 넥타이 핀은 대한그룹 로고가 새겨진 것. 정명희와 나란히 입장했다. 볼룸 입구에서 두 사람이 멈추자 주변의 대화가 잠깐 줄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두 번 터졌다. 연화는 입구에서 한 발 뒤에 서 있었다. 아내의 자리는 남편 옆이 아니라, 남편이 돋보이는 각도에 있었다.
태욱이 연화를 봤다.
"잘 준비했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사람들 앞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태욱은 좋은 남편이었다.
"감사합니다."
연화도 좋은 아내였다.
태욱이 무대로 올라갔다. 인사말이 시작됐다. 연화는 무대를 보지 않았다. 대신 객석을 봤다. 300명의 표정. 누가 박수를 먼저 치는지, 누가 휴대폰을 보는지. 12번 테이블을 봤다. 열두 번째 자리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50대 초반. 회색 양복. 옆 사람과 대화하지 않았다. 와인잔은 채워져 있었지만 입을 대지 않았다. 이 자리에 초대받은 사람이 아니라, 배치된 사람의 태도였다. 연화는 시선을 돌렸다.
인사말이 끝났다. 박수. 태욱이 무대에서 내려왔다. 정명희가 먼저 악수했다. 모자의 포옹은 없었다. 악수가 이 가족의 애정 표현이었다.
연화는 테이블 사이를 돌았다. 와인을 확인하고, 음식 서빙 타이밍을 체크하고, 불편한 게스트를 찾아 해결했다. 17번 테이블의 할머니가 음식이 짜다고 했다. 주방에 따로 요청해 저염식을 냈다. 할머니가 고맙다고 했다. 연화 이름은 묻지 않았다. 28번 테이블 근처에서 서버가 와인을 흘릴 뻔했다. 연화가 먼저 서버의 팔을 잡았다. 레드와인이 흰 테이블보에 닿기 직전이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정명희만 1초 시선을 멈추고 다시 돌아갔다. 그 1초가 평가였다.
이 모든 것이 기록되지 않는 노동이었다. 행사 보고서에는 '진행 원활'이라고 네 글자만 적힐 것이었다. 연화는 기록되지 않는 노동을 10년간 해왔다. 전 타임라인에서 정명희 측 변호사가 말했다. '며느리가 행사에 참석한 것이 재산 분할의 근거가 됩니까?' 참석이 아니라 운영이었다. 하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었다.
행사 중반. 연화는 사무국 스태프룸에 들어갔다. 오세나가 있었다. 검은 원피스에 진주 귀걸이. PR 컨설턴트로서 이 행사의 미디어 관리를 맡고 있었다.
"연화야, 수고 많다."
세나의 미소가 자연스러웠다.
"기자단 동선은 분리해놨어?"
"응. 후원자 동선이랑 겹치지 않게 했어."
세나가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연화를 봤다.
"요즘 괜찮아? 얼굴이 좀 날카로워졌어."
"행사 준비하느라 그래."
"태욱 씨는?"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다. 연화는 그 가벼움의 무게를 잴 수 있었다. 전 타임라인에서 세나는 이런 질문 사이에 정보를 수집했다. 세나가 묻고, 연화가 대답하고, 24시간 안에 그 내용이 시댁에 닿았다.
"늘 바쁘지."
"내일은 집에서 드시나 보네?"
연화의 손이 멈췄다. 내일 저녁 계획은 태욱이 어제 연화에게만 말한 것이었다. 행사 출구에서, 스태프들이 주변에 있는 상황에서. 세나가 알 이유가 없었다.
"태욱 씨가 그러던데. 오랜만에 집밥 먹는다고."
세나의 목소리가 가벼웠다. 손끝이 태블릿 모서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태욱과 세나가 직접 연락하는 사이라는 뜻이었다. 혹은 누군가를 경유해서. 어느 쪽이든 정보의 경로가 하나 보였다. 연화가 말하지 않은 것을 세나가 알고 있었다.
"응, 그런 것 같아."
연화가 웃었다. 세나도 웃었다. 두 사람의 웃음 사이에 10년의 우정과 아직 터지지 않은 균열이 같이 있었다.
스태프룸을 나왔다. 연회장 끝 복도에서 12번 테이블 쪽을 봤다. 열두 번째 자리의 남자는 이미 없었다. 디저트가 나오기 전에 떠난 것이었다. 이 규모의 행사에서 디저트 전에 나가는 사람은 두 종류다. 용건이 끝난 사람이거나, 오래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거나. 빈자리 위에 냅킨이 접혀 있었다. 좌석 카드는 가져간 뒤였다. 연화는 테이블을 지나가며 냅킨을 들었다. 아래에 명함 모서리가 반쯤 걸쳐 있었다. 손을 뻗으려는 순간 서버가 접시를 걷으며 냅킨과 함께 명함을 트레이에 올렸다.
연화는 서버를 부르지 않았다. 이미 보인 건 보였다. 명함 색이 흰색이 아니었다. 크림색에 금박. 재벌가 행사에서 자기 명함을 놓고 가는 사람은 없다. 놓고 간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하려고 남긴 것일 수 있었다. 12번 테이블의 열두 번째 손님은 흔적을 남기고 갔다.
행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게스트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연화는 출구 쪽에서 인사를 건넸다.
태욱이 다가왔다.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내일 저녁에 집에서 먹자. 오랜만에."
목소리가 따뜻했다. 사람들이 아직 주변에 있었다.
"좋아요."
태욱의 손이 연화의 허리에 닿았다. 가볍게. 소유를 확인하는 손이었다. 예전에는 그 무게가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잠금장치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토요일은 비워둬. 다른 약속 잡지 말고."
웃으며 말했다. 주변 사람들은 자상한 남편의 주말 계획으로 들었을 것이었다. 연화는 그 문장의 구조를 들었다. '비워둬'가 먼저, '잡지 말고'가 뒤. 허락이 아니라 지시였다. 선택지를 닫는 순서였다. 전 타임라인에서는 이 말이 배려처럼 들렸다.
"알겠어요."
연화가 웃었다. 태욱이 먼저 나갔다. 기사가 차 문을 열었다. 정명희도 떠났다. 별도의 차였다. 연회장이 비었다.
스태프가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수국이 하나씩 치워졌다. 연보라색 꽃잎이 쓰레기봉투 안으로 들어갔다. 조명이 절반으로 줄었다. 화려했던 공간이 원래의 빈 볼룸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핸드백 안에 수첩이 있었다. 꺼내지 않았다. 이 호텔에는 CCTV가 있고, 스태프룸에도 있다. 적을 내용은 집에 돌아간 뒤, 태욱이 잠든 시간에 적을 것이었다. 서재가 아니라 욕실에서. 물소리를 틀어놓고.
호텔 정문을 나왔다. 8월 저녁 공기가 무거웠다. 낮의 열기가 아스팔트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볼룸 안의 에어컨 냉기가 피부 위에서 빠르게 걷혔다. 택시를 잡았다.
한남동으로 가는 차 안에서, 연화는 창밖을 봤다. 한강 위로 도시의 불빛이 번졌다. YK인터내셔널. 초청 명부에 없다가 갑자기 좌석 카드를 받은 회사. 항목을 바꿔가며 반복 발주를 받은 외주사. 본부 직접 지정. 디저트 전에 사라진 남자. 그리고 정명희가 체크하지 않은 이름.
법인은 등기를 남긴다. 등기부등본은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행사장 밖에서 이 이름을 확인한다. 그리고 세나의 경로도.
휴대폰이 울렸다. 카카오톡이었다. 세나. '오늘도 수고했어 ♥ 집에 잘 들어가!'
3초 뒤, 태욱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수고했어. 집에 잘 들어가.'
같은 문장이었다. 같은 시간대였다.
연화는 두 메시지를 나란히 봤다. 표현이 겹치는 건 우연일 수 있었다. 하지만 세나가 태욱의 내일 저녁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정보가 어딘가에서 새고 있었다. 방향을 아직 특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경로가 존재한다는 건 확인됐다.
택시가 한남대교를 건넜다. 창밖의 불빛이 강물 위에서 흔들렸다. 수국의 연보라색은 이미 기억에서 지워졌다. 남은 것은 이름과 경로뿐이었다.
확인할 것이 두 개가 됐다. 이름 하나. 경로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