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친구는 어디까지 친구일까
세나가 먼저 와 있었다.
D-112. 청담동 골목 안쪽. 간판 없는 이탈리안. 예약제.
세나는 이런 가게를 잘 알았다. PR 컨설턴트라는 직업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고, 사람을 만나는 장소를 고르는 것도 실력이었다.
세나가 고르는 식당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조명이 어둡고, 테이블 간격이 넓고, 직원이 먼저 말을 걸지 않는 곳.
비밀을 말하기 좋은 구조였다. 그래서 연화도 이 자리를 택했다. 비밀을 말하러 온 게 아니라, 비밀을 심으러 온 것이었다.
"연화야, 여기."
세나가 손을 들었다. 창가 자리. 흰 린넨 냅킨이 접혀 있고, 와인은 이미 시켜져 있었다. 화이트. 잔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세나의 차림은 검은 슬리브리스에 얇은 골드 체인. 화려하지 않지만 비싼 옷을 입는 사람이었다. 그 감각이 이 업계에서 사는 방법이었다.
"미안, 좀 늦었지?"
"아니, 나도 방금 왔어."
거짓말이었다. 세나의 와인 잔은 이미 한 모금이 빠져 있었다. 연화는 그걸 보고도 모른 척했다. 세나의 거짓말은 항상 이런 크기였다. 작고, 의미 없어 보이고, 그래서 넘어가게 되는 것.
의자에 앉으면서 식당 안을 훑었다. 테이블 여덟 개. 손님은 세 팀. 대화 소리가 서로 섞이지 않는 간격이었다.
"지난번 행사 때는 제대로 못 봤는데. 좀 쉬었어?"
"뭐, 늘 그렇지."
"얼굴이 좀 나아졌다. 행사 때는 진짜 걱정했어."
걱정은 경계를 낮추는 가장 효과적인 언어였다. 연화는 그걸 알고 있었다.
"세나가 신경 써주니까 그렇지."
"아, 이러면 어떡해."
세나가 웃었다. 자연스럽고 따뜻했다.
전 타임라인에서도 세나의 웃음은 이랬다. 배신이 시작된 뒤에도 웃음의 온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늦게 알았다.
음식이 나왔다. 부라타 샐러드, 트러플 파스타.
세나가 고른 메뉴였다. 연화는 메뉴판을 보지 않고 "세나가 골라줘"라고 했다. 주도권을 넘기는 것처럼 보이면서, 세나의 방심을 유도하는 것.
대화는 가볍게 흘렀다. 세나의 최근 프로젝트. IT 스타트업 대표의 불륜 위기관리 건.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힌트는 충분했다.
세나는 늘 이랬다. 비밀을 지키는 척하면서 비밀의 윤곽을 보여주는 사람. 그것이 자기 능력의 증거이기도 했다.
"요즘 정신없다. 사건이 터지면 주말도 없어."
"고생이 많네."
"그래도 재미는 있어. 사람들이 위기에 빠지면 진짜 얼굴이 나오거든."
세나가 웃으면서 와인을 마셨다. 연화는 그 문장을 기억해뒀다. 위기에 빠지면 진짜 얼굴이 나온다. 그 말이 세나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걸 세나는 모를 것이었다.
공통 지인의 결혼 소식이 나왔다. 대학 동기 수진이가 두 번째 결혼을 한다고. 세나가 청첩장 사진을 보여줬다.
"수진이 대단하다. 두 번째인데도 이렇게 크게 해."
"용기 있는 거지."
"연화는 그런 쪽이 아니지. 한 번 결정하면 끝까지 가는 스타일."
세나의 말이 가벼웠다. 하지만 연화는 그 문장에 실린 무게를 쟀다. '끝까지 가는 스타일'이라는 평가. 태욱에게도 그렇게 보고했을 것이다. 이 여자는 쉽게 이혼을 결심하지 않을 거라고.
연화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세나가 주문한 와인이었다. 세나가 고른 식당, 세나가 고른 메뉴, 세나가 고른 와인. 이 자리에서 연화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나에게 그렇게 보이면 됐다.
파스타를 먹으면서 세나의 손을 봤다. 포크를 잡는 손이 늘 안정적이었다. 거짓말을 하면서도 손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
"연화야."
세나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좀 진지한 얘기 해도 돼?"
"뭔데?"
"태욱 씨는… 요즘 어때?"
두 번째였다. 행사장에서도 태욱을 물었다. 같은 질문을 다른 포장으로 반복하는 건 정보 수집의 기본이었다.
"늘 바쁘지. 전무니까."
"그래도 집에서는 좀 다르잖아."
"다르긴 하지. 더 피곤해."
"부부가 다 바쁘면 안 좋은데."
세나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연화는 그 사이를 썼다.
"실은 나, 요즘 좀 생각하는 게 있어."
"뭔데?"
세나의 눈이 달라졌다. 미세하게. 동공이 넓어지는 방향.
"혼자 뭐라도 좀 해보고 싶어서. 다음 주에 컨설팅 쪽 사람 한 명 만나보기로 했어."
"컨설팅? 무슨?"
"브랜드 쪽. 이세린 대표 알지? 그쪽 업계 사람 소개받았어."
이세린의 이름은 진짜였다. 다음 주 미팅은 거짓이었다. 이 정보는 세나에게만 말했다. 하경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와, 연화 너 진지한 거야?"
"아직 만나보는 단계야. 근데 세나한테는 말해두고 싶었어."
"왜 나한테?"
"친구니까."
세나가 잠깐 침묵했다. 1초. 웃었다.
"좋다. 연화가 뭐라도 하면 나는 무조건 응원이야."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시선이 먼저 연화의 왼손을 훑었다. 결혼반지가 있는 손을.
"근데 시어머님은 알아?"
"아니. 아직 아무한테도 안 말했어. 세나한테만."
이 문장이 핵심이었다. '아무한테도 안 말했다. 너한테만.' 세나가 정말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다면, 태욱은 '컨설팅'이라는 단어를 알 수 없다. 세나가 말한다면, 태욱은 안다.
검증은 단순했다.
"알겠어. 나만 알고 있을게."
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진지했다. 전 타임라인에서도 세나의 약속은 진지한 표정 위에 올라 있었다.
디저트가 나왔다. 티라미수.
세나가 숟가락을 들다 멈췄다.
"아, 잠깐."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진동이었다. 화면을 확인하고 뒤집어 놓았다. 0.5초.
연화는 그 0.5초 안에 화면 상단을 봤다. 카카오톡 알림. 보낸 사람의 이름.
강 전무실 최비서.
이름 세 글자면 충분했다.
연화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숟가락을 들었다. 티라미수를 한 입 떴다.
"맛있다."
"여기 디저트가 진짜 괜찮아."
세나의 목소리는 자연스러웠다. 휴대폰을 뒤집어 놓은 동작도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태욱의 비서실에서 세나에게 카카오톡이 오는 건 자연스럽지 않았다.
행사 미디어 관리는 재단 사무국 라인으로 오간다. 전무실 비서에게서 직접 연락이 오는 건 업무가 아닌 채널이었다.
"세나야."
"응?"
"오늘 고마워. 이런 얘기 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
세나의 눈이 부드러워졌다.
"무슨 소리야. 우리가 몇 년인데."
10년이었다. 대학 3학년 때부터. 그 10년 안에 연화의 결혼식, 시댁 행사, 새벽 전화들이 들어 있었다.
전 타임라인에서 세나는 그 10년의 모든 것을 무기로 바꿨다. 연화의 동선을 넘기고, 불만을 보고하고, 감정의 균열을 시댁에 전달했다.
이 시점의 세나가 이미 결정한 사람인지, 아직 결정하지 않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생겼다. 오늘 심은 정보가 태욱에게 도달하는 시간을 재면 됐다.
식당을 나왔다. 청담동 가로수에 가로등 불빛이 걸려 있었다.
세나가 먼저 택시를 잡았다.
"조심해서 가."
"세나도."
세나가 택시에 탔다. 차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뒷좌석에서 세나가 휴대폰을 드는 게 보였다.
누구에게 먼저 연락할까. 비서실인지, 태욱에게 직접인지. 경로는 달라도 도착지는 같을 것이었다.
택시가 사라졌다.
연화는 걷기 시작했다. 8월 저녁 바람이 불었다. 열기가 가시지 않은 공기. 청담 사거리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걸으면서 휴대폰을 꺼냈다. 하경에게 카카오톡을 보냈다.
'밥 먹었어?'
답이 바로 왔다.
'라면. 언니는?'
'파스타. 다음엔 같이 먹자.'
'좋아. 냉면 먹으러 가자. 을지로 그 집.'
연화는 화면을 보고 잠깐 멈췄다. 을지로 냉면집은 대학 때부터 다니던 곳이었다. 하경과 세나, 셋이서.
이제는 둘이 갈 곳이었다.
'응. 다음 주에.'
보내고 나서 화면을 껐다. 하경의 답장 속도는 늘 빨랐다. 새벽에도, 점심시간에도. 묻지 않고 먼저 답하는 사람이었다.
택시를 잡았다. 한남동.
집에 도착한 건 9시였다. 태욱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구두를 벗고 거실을 지나 침실로 갔다. 핸드백을 침대 위에 내려놓으면서 안쪽을 확인했다. 수첩은 그대로였다. 오늘 쓸 내용은 아직 없었다. 내일이면 채워질 것이었다.
화장을 지우고 샤워를 했다.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렸다.
"늦었네. 밥은?"
"먹고 왔어요. 세나 만났거든요."
"세나? 오랜만이네."
태욱의 목소리에 관심은 없었다.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렸다. 연화는 드라이기를 끄지 않았다. 소리 너머로 태욱의 반응을 기다렸다.
아무 말 없었다.
그날 밤, 태욱은 서재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연화는 침실에 누워 천장을 봤다. 반응이 오려면 하루에서 이틀이었다.
다음 날 저녁. D-111.
태욱이 퇴근 후 거실 소파에 앉았다. 연화가 물을 건넸다.
태욱은 양복 재킷을 소파 팔걸이에 걸치고 있었다. 이 남자가 집에서 재킷을 바로 안 거는 건 할 말이 있을 때였다. 10년을 같이 살면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고마워."
한 모금 마시고, 넥타이를 풀면서 말했다.
"요즘 뭐 알아보는 거 있어?"
연화의 손이 컵 위에서 멈췄다. 0.3초. 다시 움직였다.
"갑자기 무슨?"
"아니, 그냥. 요즘 바깥에 좀 나가는 것 같아서."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통제의 부드러움이었다. 태욱은 추궁하지 않는다. 확인한다. 확인하는 방식이 추궁보다 무거웠다.
"행사 정리 건으로 사람들 만나는 거예요."
"컨설팅 쪽 사람도?"
손끝이 차가워졌다.
컨설팅. 세나에게만 말한 단어였다. 하경에게 한 적 없다. 정명희에게도 없다. 어제 저녁, 그 식당 테이블 위에서만 꺼낸 단어.
세나의 입에서 비서실로, 비서실에서 태욱에게. 24시간 25분 만이었다.
"세나가 아는 사람 있다고 해서, 한번 얘기 들어볼까 했어요."
태욱이 연화를 봤다. 2초.
"일하고 싶으면 말해. 재단 쪽에 자리 하나 만들어줄 수도 있어."
'만들어줄게'가 아니라 '만들어줄 수도 있어.' 선택지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선택지의 범위를 자기 안에 가두는 문장이었다. 문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 밖에 또 다른 벽이 있는 방.
태욱의 문장은 늘 이런 구조였다. 10년 동안 한 번도 명령한 적 없이, 한 번도 선택을 준 적 없는 남자.
"괜찮아요. 그냥 알아보는 수준이에요."
"그래."
태욱이 일어났다. 서재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연화는 소파에 남아 있었다. 손이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떨리지 않았다. 대신 차가워졌다.
경로가 보였다.
세나 → 강 전무실 최비서 → 태욱.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도시의 불빛이 물 위에 흩어져 있었다.
세나의 웃음이 떠올랐다. 오늘 식당에서의 웃음이 아니라, 대학 시절의 웃음이. 기말고사 끝나고 학교 앞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연화야 우리 평생 친구하자' 하던 그때의 웃음이.
그 사람은 진짜였다.
세나가 대한그룹 외곽의 위기관리 라인에 처음 발을 들인 게 5년 전이었다. 연화가 소개해줬다. 그때 연 문이 세나를 이쪽으로 데려왔고, 그 문 너머에서 세나는 자기만의 생존 루트를 찾았다.
전 타임라인에서 연화는 마지막까지 몰랐다. 세나의 배신을 안 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빈손으로 나온 뒤였다. 친구가 시댁의 눈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 분노보다 먼저 온 건 멍함이었다.
화가 나기 전에 무너졌고, 무너진 뒤에는 화를 낼 힘도 없었다.
이번에는 순서가 달랐다. 먼저 알았다. 알고 있으면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알고 있어도,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등 뒤가 서늘했다. 에어컨 바람인지, 다른 무엇인지 구분하지 않았다.
욕실에 들어갔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소리 아래에서 수첩을 꺼냈다.
결론: 세나는 누수 지점. 현재 진행형.
펜을 놓았다. 수첩을 닫고 욕실장 안쪽에 넣었다.
물을 끄고 나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세나도, 태욱도, 정명희도 이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지 못할 것이었다.
세나에게 줄 정보의 종류를 바꿔야 했다. 더 이상 진짜를 섞지 않는다. 세나에게 가는 것은 가짜뿐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짜를 태욱이 진짜로 받아먹는 과정을 기록한다.
누수를 막는 게 아니라, 누수의 방향을 쓸 것이었다.
친구가 적이 된 건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적의 위치를 아는 건 전략이었다.
새벽 2시. 태욱이 서재에서 나와 침실에 들어왔다. 연화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든 척이었다.
태욱이 옆에 누웠다. 이불을 당기는 소리. 숨소리가 고르게 변하기까지 12분.
연화는 눈을 떴다.
이불 속에서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쌌다. 손이 차가웠다.
10년 전 세나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너는 혼자 다 해결하려고 하지 마. 나 있잖아.'
그 말을 믿었다. 오래 믿었다.
믿음이 끊어진 자리는 상처가 아니라 정보가 되었다.
세 번이면 패턴이 된다. 패턴이 되면 증거가 된다.
어둠 속에서 내일을 정리했다.
다음 미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금요일 저녁 7시, 성수동. 날짜와 장소가 있는 거짓.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잠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