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계약 조건
아크는 높은 곳에 있었다.
KCA 관할 특수 주거 구역의 최상층. 52층.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바닥부터 천장까지 통유리가 펼쳐졌다. 세이프 존의 야경이 발아래 깔려 있었다. 수천 개의 불빛이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 너머로 언노운 존과의 경계에 세워진 차폐벽이 어둡게 서 있었다. 이마고가 경계를 시험하는 밤마다 서치라이트가 천천히 회전하는 곳.
이도하는 신발을 벗었다. 현관에 슬리퍼가 한 켤레 놓여 있었다. 새것이었다. 비닐 포장이 아직 벗겨지지 않은. 크기가 260이었다. 도하의 발 사이즈. 누군가 확인하고 준비한 것이었다.
도하는 비닐을 벗기고 슬리퍼를 신었다. 에덴에서는 이런 것이 지급되지 않았다. 복도에 놓인 공용 실내화를 맞든 안 맞든 가까운 것을 신으면 그만이었다. 발에 맞는 슬리퍼라는 것이 묘하게 어색했다.
"방은 왼쪽 끝."
강진의 목소리가 거실 안쪽에서 들렸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넓은 거실을 가로질러 통유리 앞 소파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등만 보였다. 넓은 어깨. 꼿꼿한 자세. 두통을 가진 사람이 앉는 자세가 아니었다. 통증을 견디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앉는 자세였다.
캐리어를 끌고 복도를 걸었다. 왼쪽 끝. 문을 열었다. 방 하나, 침대 하나, 책상 하나, 빈 옷장. 창문 너머로 세이프 존의 불빛이 들어왔다. 에덴의 6인실보다 세 배는 넓었다.
캐리어를 열었다. 옷 세 벌. 교본 두 권. 세면도구. 옷장에 넣으니 선반 하나도 채우지 못했다.
정리를 끝내는 데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거실로 나왔을 때 강진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통유리를 향하고 있었다. 미간에 주름이 있었다. 매칭실에서도, 계약실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그 주름은 이 남자의 기본값인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에 서류가 놓여 있었다. 얇았다. 별도의 생활 수칙서.
"가이딩 스케줄."
강진이 서류를 가리켰다.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도하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서류를 읽었다. 월, 수, 금. 오후 8시. 가이딩 장소: 아크 내 지정 공간. 방법: 접촉식 안정화. 시간: 1회 30분. 아래에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에스퍼의 상태에 따라 일정은 변경될 수 있음.'
주 3회 정기 가이딩. 이 사람은 주 3회, 타인의 손이 필요하다. 3년 이상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3년간의 두통. 진통제로 버텨온 시간.
"첫 가이딩은 내일이에요?"
"오늘."
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강진이 처음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KCA에서 내일부터라고 —"
"KCA가 여기 사는 건 아니니까."
말을 자르는 방식에 거칠음은 없었다. 다만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단정함이 있었다. 요청이 아니라 통보. 질문이 아니라 확인.
"알겠습니다."
도하가 답했다. 계약서 제7조 3항. 긴급 가이딩은 에스퍼가 요청할 수 있으며, 가이드는 이를 거부할 수 없다. 강진은 그 조항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계약 첫날부터. 두통이 그만큼 심하다는 뜻이었다.
강진이 일어서서 주방으로 갔다. 도하는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소리가 났다. 찬장이 열리는 소리. 물이 따르는 소리.
강진이 돌아왔다. 테이블 위에 컵을 두 개 놓았다.
물이었다.
도하는 그 두 개의 컵을 보았다. 한 번. 컵 하나는 강진 쪽에, 컵 하나는 도하 쪽에.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생각하지 않고 한 것처럼. 에덴에서 도하는 항상 혼자 컵을 챙겼다. 자신을 위해 컵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 도하의 자리를 생각하고 컵을 꺼낸다는 것. 말이 없는 사람의 가장 조용한 배려였다.
강진은 이미 가이딩 공간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도하는 물을 마셨다. 차가웠다.
아크의 가이딩 공간은 거실에서 떨어진 별도의 방이었다.
조명이 낮았다. 간접등만 켜져 있었다. 벽면이 흡음재로 되어 있어 외부 소리가 차단되었다. 소파가 하나, 작은 테이블이 하나. 그리고 벽에 부착된 생체 모니터. 심박수, 뇌파, 감각 부하 지수가 실시간으로 표시되는 장비. S급 전용이었다. 에덴에서는 본 적 없는 등급의 장비.
강진이 소파에 앉았다. 등을 기대지 않았다. 허리를 세우고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은 자세. 가이딩 직전의 에스퍼는 대부분 이런 자세를 취했다. 타인의 파동이 자신의 신경계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해야 하는 순간. 그것은 강한 사람에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는 것이었으므로.
도하는 맞은편에 앉았다.
"시작해도 될까요?"
강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을 뒤집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말 대신 손이 먼저인 사람이었다.
도하는 손을 올렸다. 손끝이 닿았다. 파동을 보냈다. 의식적으로. 에덴의 교본 제3장, 접촉식 안정화 기초. 표준 주파수 대역. 안정적인 파형. 일정한 출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3초. 5초. 10초. 강진의 미간에는 여전히 주름이 있었다. 생체 모니터의 수치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심박수 87. 감각 부하 지수 높음.
표준 주파수가 강진의 방어기제에 부딪혀 튕겨 나오고 있었다. 18명의 가이드가 실패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높은 주파수를 밀어 넣을수록 벽이 단단해지는 것을 손끝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안 돼?"
강진이 물었다. 눈을 감고 있었다. 목소리에 실망은 없었다. 익숙함이 있었다. 19번째 실패에 대한.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도하는 입술을 다물었다. 어제는 됐다. 계약실에서 강진의 두통이 멈추었다. 3초 만에. 무엇이 달랐는가. 의식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교본의 방식이 아니었다.
도하는 의식을 내려놓았다.
교본을 버렸다. 표준 주파수를 버렸다. 8년간 에덴에서 주입받은 방법론을 전부 내려놓고, 자신의 고유한 것을 꺼냈다. 너무 낮아서 아무에게도 닿지 않던 주파수. 120Hz 이하. 에덴에서 '불량'이라고 판정받은 파동. 가공하지 않은 채로, 있는 그대로 내보냈다.
생체 모니터가 움직였다.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심박수가 87에서 82로. 감각 부하 지수가 한 단계 내려갔다. 강진의 호흡 간격이 늘어났다. 미간의 주름이 천천히, 얕아졌다.
어제와 같았다. 도하의 저주파가 강진의 방어기제를 뚫지 않고 그 아래로 스며들었다. 높은 벽을 넘으려 하지 않았다. 벽 아래의 지하수맥처럼, 암반 틈을 타고, 방어기제가 인식하지 못하는 깊이에서 흘렀다.
30분이 지났다.
도하가 손을 뗐다. 강진은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미간의 주름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심박수 71. 감각 부하 지수 정상 범위. 생체 모니터의 숫자가 처음으로 안정 영역에 들어와 있었다.
도하는 조용히 일어섰다.
"끝났습니다."
대답이 없었다. 도하는 방을 나왔다.
밤이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던 도하의 발이 복도에서 멈추었다. 소리가 들렸다. 아크 안의 다른 곳. 인접 복도 너머. 남자 두 명의 목소리였다. KCA 로고가 새겨진 재킷. 관리관들이었다. 정기 방문 점검인 것 같았다.
도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라클이 이 조합을 세 번 걸러냈는데."
한 명의 목소리가 낮게 들렸다.
"세 번씩이나요?"
"접수 단계에서. 매번 '부적합' 플래그가 먼저 떴어. 그냥 넘어가도 됩니까, 라고 내가 물었더니 위에서 그냥 진행하라고 했거든. 이상하지 않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도하는 숨을 죽였다.
"…그거 보고서에 올렸습니까?"
"올릴 수 있겠어? 위에서 진행하라고 했는데."
발소리가 멀어졌다.
도하는 복도에 서 있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오라클이 세 번 걸러냈다. 접수 단계에서, '부적합' 플래그가 먼저 떴다. 그런데 위에서 진행 지시가 내려왔다.
교본이 틀렸거나, 오라클이 틀렸거나, 혹은 이 모든 것이 의도된 것이거나.
도하는 세 번째 가능성에서 손끝의 파동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도하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교본을 펼쳤다. 제5장, 에스퍼-가이드 공명 이론. S급 에스퍼에게 유효한 가이딩 주파수 범위는 고대역, 8,000Hz 이상. 강한 파동을 강한 파동으로 눌러야 한다는 논리.
도하의 파동은 120Hz 이하. 교본에 따르면 '인지 불가 영역'. 유효 가이딩 불가. 닿을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닿았다.
도하는 교본을 덮었다. 창밖의 불빛을 보았다. 세이프 존의 밤은 고요했다.
그리고 조금 전 복도에서 들린 목소리가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오라클이 세 번 걸러냈는데 위에서 진행하라고 했다.
이 시스템에서 '예외'는 '결함'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런데 지금, 도하가 예외인지, 시스템이 예외인지, 둘 다인지. 알 수 없었다.
문 아래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강진의 방에서였다.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도하는 그 빛을 한동안 보았다. 그리고 교본의 첫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다음 날 오후, KCA 담당관에게서 전화가 왔다.
강진의 방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강진이 전화를 받았다. 수직으로 선 목소리가 벽 너머로 얇게 들렸다.
"가이딩 효과 측정 데이터 제출 요청입니다. 1회 가이딩 이후 생체 모니터 수치와 에스퍼 자기 보고서를 —"
"없어."
"차강진 씨, 이건 계약 조항에 명시된 —"
"데이터는 없어. KCA가 내 신경계 수치를 원하면 직접 측정하러 와. 여기 아무 때나 올 수 있어? 아니잖아."
전화가 끊겼다.
도하는 교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실에서 강진이 소파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조용해졌다.
이 계약은 KCA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생체 모니터, 정기 보고, 데이터 제출. 계약서 42쪽 곳곳에 심어진 조항들. 강진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거부했다. 하지만 도하는 거부할 수 없었다. E급 가이드에게 계약 이탈은 위약금이었고, 위약금은 3년치 생활 보조금이었다.
도하는 손끝을 쥐었다가 폈다.
닿는다는 것과, 통제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