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교수형 밧줄보다 지루한 것
죽을 곳을 찾아 이곳까지 왔는데, 세상은 지나치게 시끄러웠다.
황혼이 성휘 학당의 첨탑을 물들이고 있었다. 입학 시험장 광장. 수백 명의 지원자가 떠들어대는 소리가 안개처럼 깔렸다. 기대, 긴장, 허세 — 젊음이라는 병의 증상들.
카이락스는 광장 한가운데서 혼자 하늘을 보고 있었다.
붉은 하늘.
백오십 년째 같은 색이었다. 전장에서 보았던 하늘도, 심연의 끝에서 올려다본 하늘도, 이 학당의 하늘도 — 저물 때는 전부 똑같이 붉었다.
용사들은 모두 죽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신족도, 인간도, 그 무엇도. 백오십 년 동안 수천 번의 도전을 받고 수천 번 살아남았다. 죽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죽여줄 자가 없었다. 그래서 — 이 학당에 왔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용사를 찾으러. 자신의 끝을 만들어줄 자를 기다리러.
지루하군.
주머니 속 입학 서류의 이름은 '레온 아르케인'. 몰락 귀족가의 마지막 후손. 성흔 기록 없음. 전투 경력 없음. 추천인 없음.
완벽한 이력이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불었다. 검은 코트 자락이 흔들렸다. 코트 안쪽, 왼쪽 소매에 새겨진 문양이 잠시 빛났다가 꺼졌다. 벨제르가 심어둔 연락 문양. 보고를 재촉하는 신호였다.
카이락스는 소매를 쓸어 문양을 눌렀다. 꺼졌다. 보고할 것은 아직 없었다.
"자, 줄 서라! 성흔 측정 순서대로 배치한다!"
시험관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렸다. 학생들이 술렁이며 줄을 만들기 시작했다. 카이락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어깨를 스쳤다. 은발의 청년이 곧은 걸음으로 앞줄을 향해 걸어갔다. 등에 새겨진 문장 — 아스테리아 황가. 호위 기사 두 명이 뒤따랐으나 청년의 손짓에 멈추었다.
황태자라. 인간은 여전히 혈통에 줄을 세우는군.
은발의 청년이 잠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1초도 되지 않는 접촉. 카이락스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고, 황태자는 미간을 좁히며 앞으로 걸어갔다.
별것 아니었다. 벌레가 벌레를 스친 것뿐이었다.
카이락스는 줄의 맨 뒤에 섰다.
*
성흔 측정은 단순했다.
수정구에 손을 얹는다. 내부에 잠든 성흔이 반응한다. 각인된 문양의 수 — 각(角) — 이 측정되고, 그 수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1각이면 E급. 3각이면 C급. 6각 이상이면 S급.
줄이 줄어들었다. 수정구가 빛날 때마다 광장에서 탄성이 터졌다.
"3각! C급!"
"와, 4각이다! 어느 가문이야?"
카이락스는 줄에 서서 측정을 지켜보았다. 흥미로운 것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 측정될 때마다 수정구 내부의 감응 회로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패턴이 있었다. 인간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진동. 회로의 한계가 보였다.
이 장치의 측정 상한은 8각이다. 그 이상은 읽지 못한다.
쓸모없는 관찰이었다. 하지만 백오십 년의 습관은 쉽게 죽지 않았다. 전장에서 적의 무기를 분석하던 버릇이 이런 곳에서도 작동했다.
은발의 황태자가 수정구 앞에 섰을 때, 시험관의 표정이 달라졌다.
빛이 폭발했다. 수정구 전체가 금빛으로 물들었다. 감응 회로가 비명을 지르듯 떨렸다. 광장이 조용해졌다.
"...6각. S급입니다."
시험관의 목소리가 떨렸다. 주변에서 숨소리조차 멈춘 듯했다. 황태자는 담담하게 손을 뗐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주변 학생들의 눈에 경외심이 번졌다.
6각. 인간 기준으로는 경이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카이락스는 하품을 참았다.
칠죄 마왕군의 총사령관이 각으로 따지면 몇이 될까. 백? 천? 셈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인간의 척도로 심연을 재는 것은 손바닥으로 바다를 담는 것과 같았다.
줄이 줄었다. 카이락스의 차례가 왔다.
시험관이 서류를 훑었다.
"레온 아르케인... 성흔 기록 없음?"
"네."
"혹시 지방 출신이신가요? 간혹 측정소가 없는 변경 지역에서—"
"그냥 없습니다."
시험관이 입을 다물었다. 더 묻지 않았다. 카이락스의 목소리에는 대화를 끊는 온도가 있었다.
"수정구에 손을 올려주십시오."
카이락스는 수정구 앞에 섰다.
투명한 결정체. 안에 성흔 감응 회로가 새겨져 있었다. 정밀한 기술이었다 — 인간치고는.
손을 얹었다.
심연의 힘이 손끝에서 꿈틀거렸다. 반사적으로. 이 수정구를 가루로 만드는 데에는 숨 한 번이면 충분했다. 광장 전체를 소거하는 데에는 눈 한 번 깜빡이면 됐다.
카이락스는 그 충동을 삼켰다.
0.01%. 그것도 과하다. 0.001%.
모든 것을 잠갔다. 심연의 파동을, 허무의 근원을, 백오십 년간 쌓아온 존재의 무게를. 수정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빛이 스러졌다.
시험관이 수정구를 들여다보았다. 두 번. 세 번. 기구를 두드려 보기까지 했다.
"...0각입니다."
광장이 술렁였다.
"0각? 그게 가능해?"
"측정기 고장 아냐?"
"저 사람 왜 온 거야... 돈 내고 입학하는 건가?"
속삭임이 파도처럼 퍼졌다. 앞줄에서 돌아본 시선들. 그중에는 은발 황태자의 시선도 있었다. 잠깐. 스치듯이.
시험관이 난처한 표정으로 카이락스를 보았다.
"혹시 긴장을 하고 계신 건지... 한 번 더 측정해 보시겠습니까?"
"필요 없습니다."
카이락스는 손을 뗐다. 0각. 적당했다. 조용히 지낼 수 있는 자리,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등급. 자신을 죽일 용사를 찾기에는 바닥부터 보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F급 배정입니다. 저쪽으로 이동해 주십시오."
시험관이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F급. 성휘 학당 역사상 0각 입학은 다섯 번째라고 했다.
잘됐군. 조용히 지내기엔 이 정도가 적당하지.
카이락스는 F급 대기 구역을 향해 걸어갔다.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수백 개의 시선. 동정, 비웃음, 경멸 — 전부 의미 없었다.
그중 하나만 빼고.
*
광장 동쪽. 성녀 후보석이라 불리는 구역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금발이 바람에 흔들렸다. 청색 눈동자. 흰 의복 위에 은빛 견장. 성녀 후보 리아 벨 루미너스. 학당에서 유일하게 입학 시험 없이 배정되는 자리였다.
그녀의 시선이 카이락스를 따라가고 있었다.
카이락스는 그것을 느꼈다. 여느 시선과는 달랐다. 호기심이 아니었다. 동정도 아니었다.
감시.
성녀의 눈. 신성력에 감응하는 눈. 거짓을 꿰뚫는다고 알려진 예언자의 감각. 인간의 척도 안에서는 가장 까다로운 장치였다.
흥미로운 장치를 갖고 있군.
카이락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성녀의 감각이 아무리 예민해도 심연의 군주가 의도적으로 숨긴 것을 간파할 수는 없다. 백오십 년 동안 신족과 인간의 용사가 수천 번 시도하고 실패한 일이었다.
하지만 — 0.1초.
걸음을 옮기는 사이, 수정구 안의 감응 결계가 미세하게 떨렸다. 카이락스가 힘을 억누르는 과정에서 새어 나간 잔향. 허무의 근원이 남긴 파문 같은 것.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시험관도, 광장의 학생들도, 6각 황태자도.
리아 벨 루미너스만 빼고.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입술이 반쯤 열렸다가 닫혔다. 하지만 카이락스는 보았다. 전장에서 수천 번 적의 동요를 읽어온 눈이었다.
저 소녀. 느꼈군.
무엇을 느꼈는지는 모를 것이다. 정체도, 정체의 윤곽조차도. 다만 '무언가가 있다'는 불안.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 그리고 — 성녀라면 아마 그것을 직감이라 부를 것이다.
카이락스는 시선을 돌렸다.
재미없었다. 여기에 자신을 끝낼 수 있는 존재 따위는 없었다. 성녀 후보도, S급 황태자도, 전부 —
발걸음이 멈췄다.
수정구 뒤편. 측정 장치의 받침대에 새겨진 결계 문양 중 하나가 갈라져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실금. 인간의 시력으로는 불가능한 발견. 하지만 카이락스의 눈에는 선명했다.
자신이 한 것이 아니었다.
결계가 갈라진 방향. 힘의 잔향. 그것은 수정구 안쪽에서 바깥으로 퍼진 것이 아니라 — 바깥에서 안쪽으로 향한 것이었다.
누군가 측정이 이루어지는 동안, 결계를 건드렸다.
카이락스는 광장을 한 바퀴 훑었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수백 명의 지원자. 시험관. 교수진. 그 누구의 얼굴에서도 이상함은 읽히지 않았다.
...재미없다고 했던가.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본인조차 눈치채지 못한 변화였다.
*
F급 대기 구역은 광장 구석이었다.
앉을 의자도 없었다. 바닥에 분필로 'F'라고 쓴 원이 그려져 있을 뿐. 그 안에 서 있는 지원자는 카이락스 포함 일곱 명.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0각과 1각. 학당의 밑바닥.
아무도 이곳을 보지 않았고, 아무도 이곳에 오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한 가지는 마음에 들었다. 조용하다는 것.
카이락스는 분필 원 위에 서서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혼이 지고 있었다. 첫 번째 별이 나타났다.
"자네."
낮은 목소리였다. 카이락스는 시선을 내렸다.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짧은 머리. 오른쪽 눈 위를 가로지르는 오래된 칼자국. 군복을 개조한 듯한 교수 예복. 옷은 교수의 것이었지만 체격은 전장을 걸어본 자의 것이었다.
알테리온. 실전 전투학 담당 교수. 학당의 교수 중 유일하게 전선에서 살아 돌아온 인물. 심연 전쟁 당시 북부 전선 소대장 출신. 부하 삼십 명 중 살아남은 것은 네 명.
그 사실을 카이락스는 알고 있었다. 북부 전선에 병력을 보낸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0각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알테리온이 카이락스를 보았다. 그 눈이 보통 교수의 눈이 아니었다. 평가가 아니라 관찰. 성흔을 보는 것이 아니라 — 사람을 보고 있었다.
"자네 손."
"네?"
"수정구에서 손을 뗄 때. 주먹을 한 번 쥐었다가 폈지."
카이락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테리온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힘을 억제하는 버릇이야. 전장에서 병사들이 하는 짓이지. 과잉 마력을 가진 자들이 폭주를 막기 위해 의식적으로 하는 동작이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F급 대기 구역의 다른 학생들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0각인 자가 왜 그런 버릇을 갖고 있는 건가."
카이락스는 알테리온의 눈을 마주 보았다. 1초. 전장을 겪은 자와 전쟁 자체였던 자의 시선이 교차했다.
"손이 추웠습니다."
알테리온이 잠시 카이락스를 응시했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렸다. 믿지 않는 웃음이었다.
"...그래. 손이 추웠겠지."
알테리온은 돌아섰다. 두 걸음 걸은 뒤 멈추었다. 어깨 너머로.
"F급도 수업은 들어야 한다. 내 수업에 빠지면 퇴학이야. 0각이든 뭐든."
발소리가 멀어졌다.
카이락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무의식적으로.
실수였다. 사소한, 하지만 눈 밝은 자에게는 치명적인.
백오십 년 만의 실수치고는 상대가 나쁘지 않군.
*
해가 완전히 졌다.
입학 배정이 끝나고, 광장이 비었다. 시험관들이 장비를 정리하고 있었다. 수정구가 받침대에서 분리되어 상자에 담겼다.
시험관 중 한 명이 멈추었다.
받침대의 결계 문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실금. 아까 카이락스가 발견한 그것. 시험관이 동료를 불렀다. 두 사람이 고개를 맞대고 결계를 살폈다. 표정이 굳어갔다.
같은 시각, 교수동.
알테리온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에는 세 명의 교수가 이미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오늘의 측정 기록지가 펼쳐져 있었다.
"보셨습니까, 알테리온 교수."
"6각 황태자 말인가?"
"아닙니다. F급 지원자 — 레온 아르케인."
알테리온이 의자에 앉았다.
"측정 장치 내부 결계가 파손되었습니다. 오늘 측정 시간대에. 이 정도 과부하라면 최소 8각 이상의 출력이 필요합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8각. 현존하는 인류 최강의 성흔이 7각. 기록상 8각은 사백 년 전 대용사 한 명뿐.
알테리온은 기록지에서 한 줄을 짚었다. '레온 아르케인. 0각. F급.' 그 옆에 빨간 글씨로 한마디가 적혀 있었다.
'측정 장치 결계 파손 — 원인 불명.'
"...긴급 회의를 소집하지."
*
F급 기숙사 3층. 창문이 하나뿐인 방.
카이락스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매트리스에서 무언가 삐걱거렸다. 심연의 왕좌보다 불편했다. 왕좌는 적어도 부서지지는 않았다.
눈을 감았다. 내일부터 수업이라고 했다.
성녀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흔들리던 청색.
그리고 결계의 실금. 자신이 남긴 것이 아닌 균열.
이 학당에 자신 말고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존재가 있다.
카이락스는 눈을 떴다.
"...지루하지는 않겠군."
천장의 얼룩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그리고 그 밤.
성녀 후보 리아 벨 루미너스의 집무실에서는 촛불 하나가 밤새 꺼지지 않았다.
그녀의 예언서 위에 새로운 문장이 떠오르고 있었다.
'심연의 군주가 학당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