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젖은 귀
3월 19일 목요일, 오후 3시 47분.
아침 일기예보는 맑음이었다.
윤시하는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박지훈도 챙기지 않았다. 교실 창문으로 오전 내내 파란 하늘이 보였다. 점심 때도 멀쩡했다. 오후 첫 교시도 그랬다.
두 번째 교시가 절반쯤 됐을 때, 창밖 하늘이 먹구름에 덮이듯 어두워졌다.
선생님이 설명하다가 창쪽을 한 번 봤다. 학생들 몇 명도 봤다. 구름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빠르게. 10분 전만 해도 없던 구름이었다.
"오늘 소나기 예보 있었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5분 뒤에 빗소리가 들렸다.
창문에 빗방울이 세게 부딪혔다. 소나기였다. 교실 안에 "아"라는 소리들이 짧게 터졌다. 우산 없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눈치를 봤다.
박지훈이 윤시하한테 속삭였다.
"야, 우산 있어?"
"없어."
"나도 없어. 씨." 박지훈이 창밖을 보면서 말했다. "오늘 비 맞겠다."
수업은 끝까지 진행됐다. 선생님이 밖을 한 번씩 보면서 설명을 이어갔는데, 교실 안 집중력이 창밖으로 분산된 게 느껴졌다. 빗소리가 창문을 두드렸다. 강한 소나기 특유의 두꺼운 소리였다.
점심시간에도 비가 계속 왔다.
외부로 나가는 애들이 줄었다. 급식실은 평소보다 빨리 채워졌다. 빗소리가 급식실 창문으로도 들려왔다. 카레 냄새랑 빗소리가 섞이는 게 이상하게 어울렸다.
강수현은 오늘도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 밥을 먹었다. 창밖 비를 한 번 봤다가 다시 식판을 봤다. 우산을 챙겨온 건지 아닌지는 모르는 채였다.
김하늘은 이수빈이랑 다른 반 친구 한 명이랑 셋이 앉았다. 오늘 비 얘기를 했다. 웃음 소리가 세 번 났다.
윤시하는 박지훈이랑 밥을 먹으면서 오후에 어떻게 할지를 생각했다. 기다리거나 맞거나. 1시간 기다리면 수업 끝나고 집에 늦게 도착하는 거였다. 맞으면 조금 젖지만 빨리 가는 거였다.
맞고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종례가 시작됐다.
담임이 이번 주 공지를 읽다가 잠깐 멈췄다.
"우산 없는 사람들, 학교 우산 있긴 한데 수량이 몇 없어. 급하면 교무실로 와."
몇 명이 받아 적는 척했다. 받아 적는 게 아니라 그냥 핸드폰 꺼내는 것이었다. 날씨 앱이었다.
종례가 끝났다.
교실에서 나오는데 복도 분위기가 달랐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어두웠다. 아이들이 핸드폰을 꺼내 날씨 앱을 확인하거나, 부모님한테 전화를 하거나, 우산 있는 애한테 같이 쓰자고 말하는 소리들이 났다. 복도 한쪽에서 누군가 "엄마 데리러 와줄 수 있어?"라고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수빈이 김하늘한테 귓속말을 했다. 김하늘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윤시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교문 쪽을 봤다.
쏟아지고 있었다.
교문 처마 아래 아이들이 모여서 비가 그치길 기다리고 있었다. 몇 명은 우산을 펴고 나가고 있었다. 우산 없이 그냥 뛰어나가는 애도 있었다. 그 애는 금방 홀딱 젖었다.
박지훈이 옆에서 핸드폰을 봤다.
"1시간은 온대."
"그래."
"야, 어떻게 할 거야?"
"그냥 맞고 가지."
"진심으로?"
"어차피 젖으나 1시간 기다리나 결과는 비슷해."
박지훈이 잠깐 윤시하를 봤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엄마한테 전화해볼게." 하고 구석으로 갔다.
윤시하는 교문 처마 끝에 서서 밖을 봤다.
빗소리가 컸다. 아스팔트 위에 빗방울이 튀기는 소리, 처마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 언덕 위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 발밑에 빗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처마 끝에서 물이 줄기처럼 쏟아졌다.
3월 소나기가 이렇게 갑자기 오는 건 드문 편이었다.
그냥 맞고 가기로 했다.
교문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야."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봤다.
강수현이었다. 처마 안쪽에 서 있었다.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있었다. 접힌 채로.
윤시하와 눈이 마주쳤다.
강수현이 1초 봤다. 눈을 내리깐 것도 아니고 올려다본 것도 아닌, 그냥 정면이었다.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화가 나거나 뭔가를 결정한 얼굴이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아닌 얼굴.
그 우산을 들어서 윤시하 쪽으로 던졌다.
그냥 던졌다. 내밀거나 건네는 게 아니라, 날아오는 방향으로.
윤시하가 반사적으로 받았다.
우산을 손에 쥔 채로 강수현을 봤다. 강수현은 이미 돌아서고 있었다. 아니, 돌아선 게 아니라 걷고 있었다. 교문 밖으로. 우산 없이. 빗속으로.
뛰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비를 맞으면서. 그 보폭으로, 그 속도로.
빗소리 때문에 주변이 시끄러웠는데 강수현이 걷는 것만 조용한 것 같았다. 빗방울이 교복 어깨를 적시는 게 보였다. 머리카락이 금방 젖기 시작했다.
멀어지면서, 귀가 보였다.
거리가 있었다. 빗속이었다. 그래도 보였다. 귀가 빨간 거.
처마 아래 남아 있던 아이들이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안 했다. 강수현이 빗속을 걸어나가는 것을 보다가 각자 시선을 돌렸다. 자기 핸드폰으로, 자기 우산으로.
윤시하는 손에 든 우산을 내려다봤다.
파란색 우산이었다. 낡지는 않았는데 특별하지도 않은, 그냥 편의점에서 파는 그 우산이었다. 아니면 집에서 가져온 것이겠지.
"같이 쓰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김하늘이었다.
자신의 우산을 이미 편 채로 서 있었다. 연한 베이지색 우산이었다. 크기가 딱 두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감기 걸리면 곤란하잖아."
잠깐 멈췄다.
"나는."
그 한 마디가 마지막에 붙었다. 나는, 이라고. 감기 걸리면 곤란하다고 했는데 그 주어가 나는, 이었다. 윤시하가 곤란하면 나는 곤란하다는 말인지, 아니면 그냥 자연스럽게 붙은 말인지.
김하늘이 우산을 윤시하 쪽으로 기울이면서 눈썹을 살짝 올렸다. 같이 가자는 눈이었다.
윤시하는 받은 우산을 손에 든 채로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폈다.
"고마운데, 괜찮아."
김하늘이 잠깐 멈췄다.
"있어?"
"응. 방금 생겼어."
김하늘이 윤시하 손에 들린 파란 우산을 봤다. 그것을 1초 보다가, 교문 밖 빗속을 봤다. 강수현이 이미 언덕 위로 걷고 있었다. 교복 등이 빗속에 있었다. 젖어가고 있었다.
그 등을 2초쯤 봤다.
표정이 아주 잠깐 달라졌다. 미소가 없는 게 아니라 미소를 쓰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수빈이 그 옆에서 김하늘의 표정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윤시하를 봤다.
뭔가 더 말할 것 같았다. 말하지 않았다.
"그래." 김하늘이 우산을 다시 세우면서 말했다. "조심히 가."
"응."
김하늘이 우산을 쓰고 교문을 나섰다. 우산 아래로 빗방울이 튀겼다. 걸음이 오늘따라 빠른 것 같았다. 아니면 원래 그 속도인데 오늘 달라 보이는 건지.
처마 아래에서 이수빈이 핸드폰을 꺼냈다.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윤시하는 우산을 펼치면서 교문을 나왔다.
비가 세게 왔다. 우산 위에서 빗소리가 빠르게 울렸다. 언덕 위로 물이 흘러내렸다. 아스팔트가 반짝거렸다.
강수현은 이미 언덕 위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멀었다. 교복이 이미 많이 젖은 것 같았다. 뒤에서 보이는 등이 빗속에 있었다.
윤시하는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파란 우산 아래에서. 강수현이 던져준 우산 아래에서.
빗소리가 계속 울렸다. 우산 천 위로 빗방울이 세게 두드렸다. 언덕 아스팔트를 따라 빗물이 얕게 흘러내렸다. 발 앞쪽으로 튀기는 물방울이 운동화를 조금씩 적셨다.
걸으면서 뒤를 한 번 봤다.
교문 처마 아래 아직 기다리는 애들이 보였다. 김하늘은 자기 우산을 쓰고 벌써 언덕 위쪽으로 걷고 있었다. 학원이 그 방향인 것 같았다. 우산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베이지색이 빗속에서도 잘 보였다.
강수현은 안 보였다.
이미 언덕 위로 올라간 것 같았다. 빗속에서 걸어가던 등이 어디쯤에서 사라졌는지 몰랐다. 뒤를 돌아봤을 때 이미 없었다.
언덕 중간쯤, 달빛 편의점 앞을 지나쳤다.
오늘은 들어가지 않았다. 가게 안에 불이 켜져 있는 게 창 너머로 보였다. 점원이 카운터 안에 있는 것도 보였다. 비 오는 날이라 손님이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우산도 없이 뛰어 들어온 것 같은 두 애가 카운터 앞에 서 있었다. 그냥 지나쳤다.
언덕을 다 내려갔다.
학원가 골목 입구에서 비가 조금 약해지기 시작했다. 소나기였으니까 오래가진 않을 것 같았다. 5분쯤 더 걸으면 집이었다.
치즈 냄새가 골목에 깔렸다. 비가 오면 냄새가 더 진하게 퍼지는 것 같았다. 어느 가게에서 나는 건지는 몰랐다.
걸으면서 우산을 내려다봤다.
파란색. 낡지 않았다. 손잡이에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이나 표시 같은 것도 없었다. 그냥 우산이었다.
내일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
빌린 건지 준 건지가 불분명했다. 던진 거였으니까. 빌려준다는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던지고 나갔다. 말도 없이. 그리고 비를 맞았다.
돌려준다고 하면 받을까. 됐다고 할까.
예상이 안 됐다. 어느 쪽도 틀릴 것 같지 않았다.
집 골목 입구에서 비가 거의 그쳤다. 하늘이 조금씩 밝아졌다. 물기 남은 아스팔트 위로 저녁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젖은 땅에서 냄새가 났다. 비 온 뒤 흙냄새와 도로 냄새가 섞인 것.
집 현관 앞에서 우산을 탈탈 털었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멈췄다.
오늘 있었던 순서가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강수현이 먼저였다. 아무 말 없이 던지고 나갔다. 설명이 없었다. 받든 안 받든 확인하지 않았다. 그냥 갔다. 비 맞으면서.
김하늘이 두 번째였다. 우산을 펴고 서서 기울였다. "같이 쓰자." 말이 먼저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는"이 붙었다.
어느 쪽이 더 많이 신경 쓴 거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 할 것 같았다.
강수현은 우산을 줬다. 자기는 맞았다. 그 뒷모습이 비를 맞으면서도 속도를 바꾸지 않았다. 뛰거나 서두르지 않았다. 귀만 빨개졌다.
김하늘은 같이 쓰자고 했다. 거절당했는데 표정이 잠깐 달라졌다가 돌아왔다. 빠른 걸음으로 먼저 교문을 나갔다.
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뭔가를 했다.
어느 쪽도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어느 쪽도 감사하다는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강수현은 확인도 안 했고, 김하늘은 거절당하고도 괜찮다고 했다.
같은 상황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윤시하는 파란 우산을 현관 옆에 세워뒀다.
내일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
빌린 건지 준 건지가 불분명했다. 던진 거였으니까. 빌려준다는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던지고 나갔다. 말도 없이. 그리고 비를 맞았다.
돌려준다고 하면 받을까.
됐다고 할까.
아니면 아무 말 없이 받을까.
예상이 안 됐다. 어느 쪽도 틀릴 것 같지 않았다.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박지훈한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엄마가 데려다줬음. 넌 어케 됐어'
'그냥 맞고 옴'
답장이 금방 왔다.
'진짜로???'
윤시하는 핸드폰을 내려놨다.
빗속에서 비를 맞고 걷던 등이 계속 눈에 남았다.
뛰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그리고 귀가 빨갰다.
그게 전부였는데 그게 계속 남았다.
내일 어떻게 돌려줘야 하나. 그게 오늘 남은 마지막 생각이었다.
말을 먼저 걸어야 할 것 같았다. "이거 네 거지?"라고 물어보면 강수현이 뭐라고 할까. 아무 말 안 하고 가방에 쑤셔 넣을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알아서 가져" 같은 말을 할 것 같기도 했다.
그 어느 쪽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윤시하는 현관에 세워둔 파란 우산을 한 번 더 봤다.
내일 비가 또 오면 어떻게 하나.
그러면 더 이상한 상황이 되는 거였다.
핸드폰 날씨 앱을 켰다. 내일은 맑음이었다. 다행이었다.
이상하게 그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뭔지는 몰랐다.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이 보였다. 하얀 천장에 창문 빛이 들어와 있었다. 비가 그치면서 저녁 빛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았다.
뛰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귀가 빨갰다.
세 문장이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잠들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