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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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문은 문장이 아니라 무기다.
새벽 4시. 블랙홀 엔터테인먼트 17층 회의실. 불이 켜져 있는 방은 이 층에서 두 개뿐이었다. 대표실과 회의실. 박대건은 대표실에서 전화를 하고 있었고, 이준은 회의실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벽면 스크린 세 개. 왼쪽은 실시간 검색어. 가운데는 커뮤니티 반응. 오른쪽은 광고주 리스크 맵. 숫자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강이준 열애', '강이준 여자친구', '서은아 루나틱'. 새벽 4시인데 검색량이 줄지 않았다. 이 업계에서 새벽에 검색량이 줄지 않는다는 것은 뉴스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뜻이었다.
광고주 리스크 맵이 이준의 눈에 들어왔다. 브랜드 10개 중 빨간불 1개. 자동차. '가족 이미지' 캠페인 중이니까. 하나라도 빨간불이 되면 위약금은 수십억이었다.
PR팀장 이민재가 들어왔다. 서류 한 묶음과 태블릿. 새벽인데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위기관리팀은 새벽에도 넥타이를 맨다. 그것이 이 업계의 문법이었다.
"댓글 톤 분석 나왔습니다."
이준은 숫자를 읽었다. 부정이 긍정을 앞서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이 주목한 것은 비율이 아니었다. 공유 횟수. 부정 댓글의 공유가 긍정의 3배였다. 이 업계에서 공유는 관심이고, 관심은 가치였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법무팀 의견은요."
"단정 문장 금지. '열애 중이다'가 아니라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알려졌다'와 '확인 중'만 사용. 확정 표현은 추후 일정에 맞춰서."
이준은 법무팀의 단어 목록을 보았다. 사용 가능: '좋은 만남', '이어가고 있다', '서로 알아가는 중'. 사용 금지: '사귀고 있다', '연인', '사랑'. 단어 하나에도 법적 무게가 달랐다. '연인'이라고 하면 계약 연애가 아닌 것이 되고, '알아가는 중'이라고 하면 빠져나갈 구멍이 남는다. 이준은 구멍 쪽을 선택했다. 항상 그래왔듯이.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법무팀의 언어는 항상 같았다. 확정하지 않는 언어. 빠져나갈 구멍을 남기는 언어. 이준은 15년 동안 그런 언어로 살아왔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문이 열렸다. 박대건이 들어왔다. 커피를 들고 있었다. 새벽 4시인데 커피잔에서 김이 올라왔다.
"확실한 건 하나야. 오늘은 우리가 기사 쓰는 날이야."
박대건이 스크린 앞에 섰다. 숫자를 3초간 보았다. 3초. 이준은 그 3초를 알고 있었다. 15년 동안 봐왔으니까.
"차서린 인터뷰 발행 예정 시각?"
이민재가 대답했다.
"내일 저녁 6시. 여성지 웹 선행 공개 후 주말 본지 배포."
"그러면 오늘 오전 10시. 우리가 먼저 터뜨린다. 차서린 기사가 나오기 전에, 열애 인정으로 판을 뒤집어."
박대건이 이준을 보았다.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어젯밤 최지훈에게 타이밍을 약속했으니까. 오늘 밤 11시. 하지만 박대건은 오전 10시를 말하고 있었다. 13시간의 차이. 최지훈과의 약속보다 빨랐다.
"최지훈에게 통보해야 합니다. 타이밍이 바뀐다고."
박대건이 웃었다. 미소가 아니라 웃음이었다. 이준이 기자와 접촉한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기자 만난 건 네 판단이야. 근데 타이밍은 내가 잡는다."
박대건이 스크린 앞에서 돌아섰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이준을 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차서린 인터뷰에 대해서는 내가 처리한다. 너는 신경 쓰지 마."
이준은 그 말을 곱씹었다. '내가 처리한다.' 처리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 기사를 막는 것인가. 차서린을 막는 것인가. 아니면 차서린을 이용하는 것인가. 박대건의 '처리'에는 항상 여러 층위가 있었다. 보이는 층위와 보이지 않는 층위. 15년 동안 봐왔지만 아직도 전부를 본 적은 없었다.
이준은 반론하지 않았다. 타이밍을 설계자가 잡는 것은 당연했다. 이 판에서 갑은 박대건이었다. 계약서에도, 현실에도.
오전 7시. 화상 연결.
스크린에 서은아의 얼굴이 떴다. 배경은 좁은 방이었다. 숙소. 흰 벽과 접이식 테이블. 아이돌 숙소의 표준 풍경이었다. 화면 안의 서은아는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다. 누아르에서 본 것과 같은 얼굴.
"서은아 씨. 오전 10시에 공식 입장이 나갑니다."
이민재가 설명했다. 보도자료 문안, 포털 배포 시점, 해시태그 전략. 서은아는 듣고 있었다.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3화에서 본 그 고요함이었다. 체념인지 결심인지 구별할 수 없는 고요함.
설명이 끝나고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서은아가 입을 열었다.
"조건 하나요."
이민재가 멈췄다. 박대건이 화면을 보았다. 이준도.
"멤버들 피해를 최소로 해주세요. 스케줄 건드리지 말아주시고요. 루나틱 이름은 보도자료에 넣지 마세요."
이민재가 박대건을 보았다. 박대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됩니다."
한 단어. 서은아의 조건은 수락되었다. 빚이 5억인 사람의 조건이 한 단어로 수락된 것이었다. 이준은 그것을 지켜보았다. 서은아는 자신을 위한 조건을 하나도 달지 않았다. 루나틱을 살려달라는 조건과 같은 방향이었다. 멤버들. 팀. 자기 자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준은 서은아를 보았다. 화면 안의 얼굴. 화장기 없는 얼굴. 좁은 어깨. 작은 모니터 뒤에 앉아 있는 사람. 빚이 5억이고, 그룹은 해체 직전이고, 남의 위장 연애 상대로 팔려 나온 사람. 그 사람이 '자기를 위한' 조건을 하나도 달지 않았다.
"저도… 계산은 할 줄 알아요."
서은아가 말했다. 이준을 보며. 화면 너머로. 이준은 그 눈을 보았다. 2초. 누아르에서 읽지 못했던 눈이었다. 지금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알겠다. 이 사람은 수동적으로 끌려온 것이 아니었다.
화상이 끊어진 뒤에도 이준은 잠시 검은 화면을 보았다. '계산은 할 줄 안다.' 그 문장이 머릿속에 남았다. 서은아의 계산은 이준의 계산과 달랐다. 이준은 자신을 위해 계산했다. 서은아는 팀을 위해 계산했다. 같은 행위, 다른 방향. 이준은 그 차이가 불편했다. 불편한 이유를 분석하려 했지만 3초 안에 끝나지 않았다.
박대건이 대표실에서 나와 회의실을 지나갔다. 이준을 보지 않았다. 커피잔만 들고 있었다. 이준은 그 뒷모습을 보았다. 15년 동안 봐온 뒷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뒷모습에서 설계자의 윤곽이 보였다. 최지훈이 4화에서 던진 질문이 떠올랐다. '인터뷰를 제안한 쪽이 차서린 본인이 아닐 수도 있다.' 박대건의 뒷모습이 복도 끝에서 사라졌다.
화상이 끊어졌다. 화면이 검게 변했다. 이준은 검은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오전 9시 30분. 이준과 서은아의 첫 합.
블랙홀 본사 지하 주차장. 이준의 차. 도윤이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서은아가 조수석에 탔다. 이준은 뒷좌석. 이것이 앞으로 6개월간의 기본 동선이었다.
"차에서 내릴 때 이준 씨가 먼저 내리고, 은아 씨 쪽 문을 열어주세요. 손은 등에 가볍게. 얼굴은 카메라 쪽을 향하되, 은아 씨를 한 번 보세요. 3초면 됩니다."
도윤이 설명했다. 프로답게. 7년 동안 이준의 동선을 관리한 사람이었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은아도 끄덕였다.
"리허설 한 번 해볼까요?"
차에서 내렸다. 이준이 먼저 내리고, 돌아가서 조수석 문을 열었다. 서은아가 내렸다. 이준이 등에 손을 가볍게 대고 — 서은아의 어깨가 좁았다. 코트 너머로 느껴지는 뼈의 윤곽. 무대 위의 센터가 이렇게 작은 사람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믿기지 않았다.
서은아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준을 보았다. 카메라를 향해야 하는 시선이 1초 동안 이준에게 머물렀다. 연기가 아니었다. 연기라면 카메라 쪽을 봐야 했다.
이준은 그 1초를 기억해두었다.
리허설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프로 두 명이 만나면 그랬다. 이준은 15년 동안 카메라 앞에 섰고, 서은아는 7년 동안 무대 위에 섰다. 둘 다 '보이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준은 보이는 것을 통제하는 쪽이었고, 서은아는 보이는 것에 자신을 맞추는 쪽이었다는 것. 어느 쪽이 더 어려운지는 모르겠다.
서은아의 손이 작았다. 코트 소매 끝에서 손가락이 조금 나와 있었다. 코트가 큰 것인지 손이 작은 것인지. 그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 섰을 것이다. 센터에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며. 지금은 그 손이 차 문을 잡고 있었다. 이준은 그것을 보고 — 보지 않기로 했다. 이상한 곳에 눈이 가기 시작하면 계산이 흐려진다.
"괜찮습니다. 한 번이면 됐어요."
이준이 말했다. 서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이 시간을 확인했다.
"9시 45분. 15분 남았어요."
오전 10시. 포털 메인.
[단독] 강이준, 열애 공식 인정 — '좋은 만남 이어가는 중'
기사가 올라간 것은 10시 정각이었다. 팩트인사이트 최지훈 기자 단독. 이준이 약속한 것보다 13시간 빨랐지만, 최지훈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독점 기사를 받았으니까. '공식 인정'이라는 네 글자의 가치는 13시간의 차이를 상쇄했다.
3분 후 실시간 검색어 1위. 5분 후 관련 기사 42건. 10분 후 커뮤니티 게시글 3,000건 돌파. 숫자가 폭발하고 있었다. 이민재가 실시간으로 보고했다.
"해시태그 점유율 87%. 차서린 관련 사전 검색은 0.3%로 묻혔습니다."
박대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계한 대로였다.
이준은 숫자를 보지 않았다. 대신 커뮤니티 반응을 읽었다.
— 강이준 열애 진짜? ㅋㅋ 15년 만이네
— 서은아? 루나틱? 해체설 나온 그 그룹?
— 사진 보니까 인정한 건 맞는데 뭔가 너무 깔끔하지 않음?
— 동선 사진 봐라 연출인가 의심됨
— 기획사에서 짠 거 아니냐 ㄹㅇ
이준은 마지막 댓글에서 멈췄다. '기획사에서 짠 거.' 정확한 추측이었다. 문제는 정확한 추측이 확산되는 속도였다.
이민재가 다시 보고했다.
"'조작' 키워드 점유율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현재 전체 댓글의 12%."
12%. 아직은 제어 가능한 수치였다. 하지만 12%가 20%를 넘으면 프레임이 된다. 프레임이 되면 기사가 된다. 기사가 되면 — 덮으려 한 것이 되레 불이 된다.
이준은 이민재에게 말했다.
"조작 프레임 대응은 어떻게 합니까."
이민재가 태블릿을 넘겼다.
"침묵입니다. 반박하면 키워드가 올라갑니다. 조작이라는 단어를 우리 입으로 말하는 순간, 그게 공식 프레임이 됩니다."
맞는 말이었다. 이 업계에서 부정은 긍정보다 오래 남는다. '조작이 아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조작'만 기억한다. 침묵이 방어였다. 하지만 침묵은 인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완벽한 답은 없었다.
이준은 스크린의 숫자를 보았다. 댓글 속도가 분당 340건. 기사 발행 30분 만에 1만 건을 넘었다. 그중 '조작' 키워드 포함 댓글이 1,200건. 12%. 숫자는 올라가고 있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동선 사진을 분석하고 있었다. '이준이 문을 여는 각도', '서은아가 내리는 타이밍', '손의 위치가 자연스럽지 않다.' 인터넷은 전문가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사진을 확대하고, 모든 각도를 분석하고, 모든 결론을 내리는 전문가. 그들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서사가 중요했다. '조작'은 서사였다. 그리고 서사는 진실보다 빠르게 퍼졌다.
동시에 서은아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준은 그것을 뒷좌석에서 들었다. 진동이 멈추지 않았다. 서은아는 화면을 보지 않았다. 화면을 보지 않는 것이 이 사람의 방어 방식이었다.
차가 강남대로를 지나고 있었다. 바깥은 평범한 서울이었다. 안은 평범하지 않았다.
이준의 휴대폰에 문자가 왔다. 최지훈.
[독점 감사합니다. 다만, 조수석 여성 건은 별개입니다. 카운트다운은 계속됩니다.]
차가 강남대로를 지나고 있었다. 서은아의 휴대폰 진동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준은 뒷좌석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조수석의 서은아는 화면을 보지 않았다.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이준은 그 얼굴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보면 안 되는 것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3초 안에 분석되지 않는 것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 DM이 아니라 문자였다.
[사진 속 여자, 서은아 아닙니다. 증거 있습니다. 내일 기사 나갑니다.]
이준은 화면을 보았다. 발신자 미상. 최지훈이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였다. 조수석 여성 본인인가. 아니면 그녀를 아는 누군가인가. 이준은 문자를 삭제하지 않았다. 삭제하면 증거가 사라진다. 증거는 무기였다.
포털 메인에 두 이름이 나란히 떠 있었다. 강이준. 서은아. 하지만 세 번째 이름이 올라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