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쉬운 길은 다 함정이었다
D-110. 성수동.
연화가 이 건물에 처음 들어온 건 사흘 전이었다. 이세린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 2층, 비어 있는 사무공간 하나를 단기 임대로 잡았다. 보증금 오백, 월세 백이십. 연화 명의가 아니라 하경 명의였다.
누수 지점을 확인한 이상, 연화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모든 것은 태욱에게 실시간으로 흘러갈 수 있었다. 세나라는 파이프라인은 아직 살아 있었다.
사무실이라고 부르기엔 작았다. 책상 하나, 의자 둘, 창문 하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연화에게 필요한 건 공간이 아니라 태욱의 동선 밖이었다.
책상 위에 노트북이 열려 있었다. 화면에는 앱 설치 페이지가 떠 있었다. 통화 녹음 자동 저장 앱. 설치 후 대상 기기에 심으면, 모든 통화 내용이 클라우드에 올라간다. 가격 월 구만 팔천 원. 리뷰 4.2점. '이혼 소송 증거 수집에 도움이 됐습니다'라는 후기가 세 번째에 있었다.
연화는 그 후기를 두 번 읽었다.
전 타임라인에서는 이런 앱의 존재를 몰랐다. 세상에는 배우자의 통화를 훔쳐 듣는 기술이 상품으로 팔리고 있었다.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쉬웠다. 태욱의 두 번째 휴대폰에 이걸 심으면, 누구와 무슨 통화를 하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었다. 외도 상대의 이름. 비서실과의 지시 내용. 세나에게 내리는 명령. 전부.
손이 마우스 위에 올라가 있었다. 설치 버튼까지 클릭 세 번이었다.
전 타임라인의 연화가 떠올랐다. 증거 하나 없이 끌려나간 자신. 눈물로 호소했지만, 법원은 감정을 듣지 않았다. 판사는 서류를 읽었다. 서류가 없는 쪽이 졌다.
이번엔 달라야 했다.
클릭했다. 다운로드가 시작됐다. 진행률 12%. 32%. 연화는 화면을 보면서 숨을 내쉬었다. 이것만 있으면 된다. 태욱의 통화 기록. 외도의 증거. 비자금의 단서. 한 번에 다 잡을 수 있다.
노크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서지혁이 서 있었다. 검은 코트에 서류 가방.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담백하고 읽히지 않는 얼굴. 하지만 시선이 먼저 노트북 화면으로 갔다. 진행률 67%.
"뭐 하시는 겁니까."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문장 끝이 올라가지 않은 것이 답이었다.
연화는 화면을 닫지 않았다.
"증거가 필요해요."
"이건 증거가 아닙니다."
서지혁이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서류 가방을 의자 위에 내려놓지 않았다. 앉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오래 있을 일이 아니라는 신호.
"이걸 심는 순간, 칼자루가 넘어갑니다. 한연화 씨가 유책배우자가 돼요."
한 문장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태욱이 외도를 했어도, 연화가 위법한 방법으로 증거를 수집했다면 법원의 시선이 달라진다. 공격하려다 오히려 칼자루를 넘기는 구조. 연화는 알고 있었다.
"지난번엔 아무것도 없어서 졌어요. 증거가 없었어요. 감정만 있었고, 감정은 법원에서 1그램도 안 나갔어요."
손이 책상 모서리를 잡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합법적으로 하다 또 지면요?"
그 문장이 나온 순간, 연화는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았다. 전 타임라인의 자리였다. 이기지 못할 거라는 공포. 다시 빈손이 될 거라는 확신. 회귀한 뒤에도, 그 공포는 몸속에 남아 있었다.
서지혁이 서류 가방을 내려놓았다. 의자에 앉았다. 그제야 앉겠다는 뜻이었다. 이 대화가 길어질 거라는 신호.
"이번엔 지더라도, 무너지진 않게 해야죠."
위로는 없었다. 서지혁은 위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문장 안에 구조가 있었다. 지는 것과 무너지는 것은 다르다는 구조.
연화는 노트북 화면을 봤다. 다운로드 완료. 파일이 바탕화면에 놓여 있었다. 설치까지 클릭 한 번이었다.
"당사자 녹음은 합법입니다."
서지혁이 말했다.
"태욱 씨와 직접 대화하면서 녹음하는 건 가능합니다."
"그건 태욱이 말실수를 해야 성립되잖아요."
"말실수를 유도하는 건 한연화 씨가 잘하는 일 아닙니까."
건조한 말이었다. 칭찬인지 지적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연화는 서지혁의 얼굴을 봤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에 뭔가가 있었다. 신뢰는 아니었다. 가능성을 보는 눈이었다.
"세나에게 가짜 정보를 흘려서 태욱의 반응 시간을 잰 사람이 당신입니다. 24시간 25분. 그 정밀함이면 충분합니다."
연화는 서지혁이 세나 건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멈췄다. 말한 적 없었다. 서지혁이 연화의 표정을 읽었다.
"하경 씨한테 들었습니다."
하경이었다. 연화는 입술을 다물었다. 하경에게 세나 건을 말한 건 사실이었다. 정리가 필요했고, 하경은 유일하게 안전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경이 지혁에게 전달한 건 예상 밖이었다.
"하경이가 왜."
"동생이 언니 걱정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죠."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연화는 그 짧음 안에서 하경의 마음을 읽었다. 하경은 연화가 혼자 모든 걸 해결하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니까 지혁에게 연결한 것이었다.
화가 나야 했다. 하지만 화가 나지 않았다. 대신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삼키려 했지만 삼켜지지 않았다.
서지혁이 일어섰다.
"그 파일 지우십시오."
연화는 돌아보지 않았다. 서지혁이 문 앞에 섰다.
"제가 대신 지울 수는 없습니다. 의뢰인의 선택이니까."
문이 닫혔다. 발소리가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사라졌다.
연화는 혼자 남았다.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바탕화면의 파일. 설치 프로그램. 클릭 한 번이면 끝이었다.
손이 마우스 위에 있었다.
전 타임라인이 떠올랐다. 증거 없이 법정에 섰던 날. 태욱 측 변호사가 서류 뭉치를 꺼냈고, 연화 측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판사가 연화를 보지 않았다. 서류를 봤다. 서류가 모든 것을 말했고, 연화의 입은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그날의 수치심은 몸에 각인되어 있었다. 눈을 감으면 법원 복도의 형광등 냄새까지 돌아왔다. 다시 그 자리에 서는 건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서지혁의 문장이 남아 있었다. 불법으로 이기면, 칼자루가 넘어간다. 회귀가 두 번 올 리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연화는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파일을 우클릭했다. 삭제. '이 항목을 휴지통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예.
휴지통을 열었다. 비우기. '휴지통을 비우시겠습니까?' 예.
화면이 깨끗해졌다.
연화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천장을 봤다. 형광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이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주먹이 쥐어져 있었다. 풀었다. 다시 쥐었다. 풀었다.
창밖을 봤다. 성수동 골목. 간판들 사이로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이 풍경은 전 타임라인에 없던 것이었다. 전 타임라인의 연화는 성수동에 온 적이 없었다. 한남동 집과 시댁 행사장, 그 두 점 사이만 왕복했다. 지금 이 창문 밖 풍경은 연화가 새로 만든 동선이었다.
핸드백을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1층 입구에 서지혁이 서 있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연화가 멈췄다.
"아직 안 가셨어요?"
"파일 지우셨습니까."
질문이었지만, 서지혁의 눈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
"지웠어요."
"잘하셨습니다."
그 말이 끝이었다. 서지혁은 더 묻지 않았다. 얼마나 망설였는지, 손이 떨렸는지, 그런 것은 물어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결과만 확인하고 넘어가는 방식. 그 방식이 이 순간에는 편했다.
서지혁이 돌아섰다. 먼저 걸었다. 연화가 뒤따라 나왔다. 성수동 골목 위로 8월의 밤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낮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은 바닥. 서지혁의 등이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움직였다.
"서 변호사님."
서지혁이 멈추지 않았다. 걸으면서 고개만 돌렸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할 거예요."
서지혁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음인지 아닌지 구분되지 않았다.
"안 하셔도 됩니다."
"변호사님 일이니까요."
"다음 주까지 태욱 씨와의 대화 기회를 만드십시오. 자연스러운 자리에서. 녹음은 제가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골목 끝에서 서지혁이 오른쪽으로, 연화가 왼쪽으로 갈렸다. 서지혁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연화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택시를 잡았다. 한남동. 성수대교를 건너는 동안 한강 위로 도시의 불빛이 흩어져 있었다. 어제는 누수 지점을 확인한 밤이었고, 오늘은 쉬운 길을 버린 밤이었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가로등이 세어졌다. 멈추면 생각이 밀려올 것 같아서였다.
집에 도착한 건 9시 반이었다. 현관을 여는데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태욱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셔츠 차림. 와인 잔이 테이블 위에 반쯤 비어 있었다.
"늦었네."
무관심의 부드러움이었다. 통제의 부드러움과 구별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하경이 만났어요. 저녁 먹고 왔어요."
거짓말이 자연스러웠다. 연화는 자신의 거짓말 근육이 단련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 집에서 살아남으려면 거짓말이 필요했고, 거짓말이 능숙해질수록 이 집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하경이? 요즘 자주 보네."
"동생인데요."
태욱이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리모컨을 집으려다가 멈췄다.
"그러고 보니, 요즘 컨설팅 쪽 사람 만난다며?"
연화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얼굴은 움직이지 않았다.
세나였다. 일주일 전 흘린 가짜 정보가 돌아온 것이었다. 24시간 25분이 아니라 며칠이 걸렸다. 직통이 아니었다. 중간에 한 단계가 더 있다는 뜻이었다. 세나에서 누군가에게, 누군가에서 태욱에게. 경유지가 있었다. 수첩에 적어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었다.
"하경이 친구 중에 프리랜서 컨설턴트가 있어요. 밥 한번 같이 먹은 거예요."
태욱의 눈이 연화를 봤다. 3초. 의심의 눈은 아니었다. 소유의 눈이었다. 자기 집에 돌아온 자기 아내를 확인하는 눈. 연화는 그 시선의 무게를 재는 법을 알았다.
"그래."
태욱이 리모컨을 들었다. 이미 관심이 옮겨간 뒤였다.
"피곤하면 먼저 자."
연화는 고개를 끄덕이고 침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는 순간 등 뒤에서 채널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욱에게 아내의 귀가는 그 정도의 사건이었다. 확인하고, 넘기고, 채널을 돌린다. 10년 전에도 같은 순서였다.
문을 닫았다. 샤워를 하면서 물소리 아래에서 오늘을 정리했다.
쉬운 길을 버렸다. 파일을 지웠다. 서지혁이 옳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몸이 기억하는 공포는 머리로 지워지지 않았다. 증거 없이 졌던 기억. 빈 손으로 법원을 나선 기억. 그 기억이 손을 마우스 위로 올려놓았었다.
이번엔 다른 길로 간다. 느리더라도. 당사자 녹음. 사실조회. 증거보전. 법정에서 살아남는 증거만 모은다.
그리고 태욱의 질문. 컨설팅 쪽 사람. 세나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가 오늘 또 하나 쌓였다. 경유지의 정체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파이프라인의 길이가 측정됐다.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나왔다. 침대에 앉았다. 핸드폰을 들었다. 하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경아, 서 변호사한테 내 얘기 했지?'
답이 바로 왔다.
'미안. 근데 언니 혼자 다 하려고 하잖아.'
'화난 건 아니야.'
'거짓말이지.'
연화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하경의 마지막 메시지를 봤다. 거짓말이지. 하경은 늘 알았다. 연화의 괜찮다가 괜찮지 않다는 것을. 연화의 화난 건 아니야가 화가 났다는 것을. 10년간 태욱 앞에서 완벽하게 유지했던 표정이, 하경 앞에서는 한 번도 통한 적 없었다.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하경에게가 아니었다. 캘린더를 열었다. 다음 주 일정을 훑었다. 수요일 저녁. 태욱의 일정이 비어 있었다. 전 타임라인에서도 수요일 저녁은 늘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척하는 밤이었다.
수요일 칸을 길게 눌렀다. 메모를 입력했다.
'저녁 같이 하자고 먼저 말한다.'
핸드폰을 이불 옆에 놓았다.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태욱은 아직 깨어 있었다.
서지혁의 말이 남아 있었다. 말실수를 유도하는 건 한연화 씨가 잘하는 일 아닙니까. 10년간 태욱의 눈에 비친 연화는 소유물이었다. 정명희의 눈에 비친 연화는 장치였다. 세나의 눈에 비친 연화는 정보원이었다. 서지혁의 눈에 비친 연화는 플레이어였다.
눈을 감았다. 수요일 저녁, 태욱 앞에 앉는다. 와인을 따른다. 녹음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묻는다.
'요즘 수요일마다 늦으시던데, 제가 뭘 할 때마다 꼭 확인하시는 건 왜예요?'
첫 번째 미끼였다. 입을 열게 만드는 질문. 대답하면 통제 발언이 녹음되고, 대답하지 않으면 수요일 밤의 공백이 드러난다. 어느 쪽이든 연화의 손에 남는 것이 생긴다.
연화는 눈을 떴다. 손바닥이 펴져 있었다. 쥐는 것은 집착이었다. 펴는 것은 준비였다.